부영(不逞)씨의 발걸음은 빠르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딴딴딴딴따라라란 행진곡에 맞춰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척척척척 걷게 되기 때문이다. 겨울의 추위와 미세먼지 덕분에 스쳐 지나는 사람도 온통 검은색 롱패딩에 마스크 차림이다. 최근 부영씨의 출근길은 늘 이렇다.
매일 아침 여덟시 사십분이면 회사로 가는 길에 있는 육교를 건너 상점가 사이의 좁은 길을 걷는다. 좁은 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소방차가 들어올 수 있을 만큼 큰 길이다. 왜 좁은 길인고 하니, 좌우로 주차된 차나 배달용 오토바이들 때문이다. 여덟시 사십분이 되었는데도 그대로 주차된 차들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해보기도 하지만 출근길의 빠듯함과 행진곡의 리듬에 맞추면 걸음을 늦추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간밤에 카페트 한장 정도 쌓인 눈(雪)이 얼어붙은 곳이 있어 신경이 쓰였다. 도시의 눈은 내리면서부터 검어지기 시작해서 구두 뒤축에 들러붙을 무렵이면 눈인지 타르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함부로 버린 담배꽁초나 담뱃진이 섞여서 일지도 모르지만, 어쨋든 불쾌한 걸음걸이가 되고 만다. 그러고 보면, 오늘 아침은 어제 먹고 남은 버거세트의 감자튀김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씹었던가, 김 빠진 사이다 만큼 짜증나는 것도 없는데, 오늘 저녁밥은, 냉장고에 남은게 있었던가, 하는 따위를 생각하다 보면 유쾌할 일이 점점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슬슬 말라빠진 감자튀김 따위는 잊고 다시 행진곡에 발을 맞춰볼까 하는 생각할 무렵이었다.
-빵빵-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바로 뒤에서 울렸다. 리듬에 맞춰 무릎에 살짝 힘이 들어가려던 참에, 흠칫하여 고개를 돌리자 좁은 길에서 차 두 대가 서로 마주보고 사이드 미러가 스칠듯 교차하는 중이었다., 경적을 울린 녀석은 - 아마도 바로 뒤에 다가오는 차일 것이다- 자기가 길 한 쪽으로 붙어 가는데 눈 앞에 사람이 걸어가니 -딱히 비둘기나 고양이 였어도 그랬겠지만- 울린 것일게다. 글쎄, 평소 같으면 자연스럽게 주차된 차들 사이의 틈으로 들어갔을 부영씨지만, 오늘은 다시 천천히 앞으로 고개를 돌려 그대로 걸었다. 딱히 길 한가운데를 걷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갑자기 경적이나 울려대는 놈에게 내가 왜 호의를 베풀어야 할까-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기 때문이다. 어째서인지 감자튀김 생각이 났다.
몇 걸음 더 나가자 슈퍼마켓과 부동산중개사가 마주보고 있는 교차로가 나왔지만, 부영씨는 평소와 달리 아직 감자튀김의 불쾌한 식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사이 검은 실루엣이 부영씨의 왼쪽을 스쳐 바로 우회전을 하더니 부영씨의 바로 앞에서 급정지했다. 끼익--하고 타이어와 도로가 마찰하는 음이 이어폰의 음악을 뚫고 귀에 들렸다.
'사고인가?'
일순 놀라 멍해진 부영씨는 멈춰섰다. 1초 정도 멈춰 있었을까? 주변에는 아무일도 없었다. 그리고 멈췄던 승용차가 그대로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차가 투수와 포수의 거리만큼 벌어지자 그제서야 보복운전을 당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찡그리며 멀어져 가는 차를 바라보았다. 그런 줄 알았으면 급정지할 때 넘어지는 척 뒷트렁크라도 내려칠 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부영씨는 생각했다. 왜 보복운전을 했을까? 아까 길을 비켜주지 않은 것 때문일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심한 것 같았다. 누가 타고 있었을까? 차 번호는 뭐였지?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한바탕 드잡이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그 차 안에 타고 있을 적(敵)을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해 괴롭히는 상상을 했다.
'문명인은 예의없이 굴어도 머리가 쪼개지지 않기 때문에 원시인보다 무례하다.'
어디선가 읽은 문구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자연히 돌도끼로 승용차를 마구 내려치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순식간에 열두 번쯤 적의 머리를 쪼갠 부영씨는, 다시 평소와 같이 음악에 맞춰 척척척척 걸어갔다. 그렇다, 지금은 문명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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