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1. 헌재 내에 윤석열 탄핵을 거부하는 재판관이 총 3명이다.

 

그래서 마은혁 재판관이 임명되면 6:3으로 탄핵되기 때문에 2명만 임명했다.

 

2. 윤석열에게 막타를 넣었다는 부담을 피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쪽에 무게를 두고 싶다.

 

왜냐하면 그 30일 윤석열 체포영장이 청구, 31일 발부되었는데,

 

경찰 입장에선 "최상목아~ 윤석열 곧 체포된다. 얼른 3명 임명해서 막타쳐라." 라고 주문한 것이다.

 

최상목이 3명을 임명했으면, 다음은 윤석열이 체포되면서 상황이 끝난다.

 

그런데 2명 임명? 과연 경찰이 이 아리까리한 상황에서 윤석열을 체포할 용기가 있을까?

 

체포하더라도, 윤석열의 막타는 경찰이 넣었지 최상목이 넣지 않았다고 발뺌할 수 있는 것.

 

...

 

그냥 쫄보라서 삽질을 한 것일 수도 있지만, 똑똑한 양반이니 합리적으로 생각해 본 내용이다.

 

 

KBS가 0시에 기미가요를 틀고, 독립기념관장이 독립을 부정하는 광복절을 맞아, 씁쓸한 소회를 남긴다.

 

뉴라이트는 자기 조상들의 친일행적을 미화하기 위해, 조선은 망해야 할 나라, 대한민국은 48년에 새로 건국되었다고 주장한다.

 

좋다.

 

이미 그들의 나라인데, 망한 나라의 국민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래서 나라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나라가 망하면, 독립운동가도 바보 취급을 받는다. 실패자.

 

수천년 후, 우리는 어떤 나라에 살았으며, 어떤 사람들이었다고 기억될까?

 

하나 예를 들어보자.

 

상주혁명.

 

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섰다. 천명을 새롭게 받은 주나라. 천명을 잃은 상나라는 바보취급을 당했다.

 

논어, 맹자, 장자...성현의 경전에도 상나라 사람은 늘 바보로 나온다. 그 책들에서 상나라 유민이 세운 나라(송나라)는 늘 바보역할이다. 송양지인, 유명하지 않은가? 조선놈은 안된다. 뭐 그런 이야기와 비슷한 것.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렇게 한 줄 써서 반항을 해본다. 우리나라 아직 안 망했다고-

 

제갈량이 왜 모험적인 전략을 취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제가 가장 동의하는 대전제는 그가 군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중텐의 설명인데, 유비와 같은 군주는 나라를 걸고 도박을 할 수 있지만

월급사장인 제갈량은 나라를 걸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 덧붙여서, 저는 저 나름대로 제갈량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근거를 하나 더 써보려고 합니다.

 

손자병법에 병귀신속이라, 좀 부족하더라도 재빨리 치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갈량의 북벌은 이 점이 부족했기에 매번 강대국 위나라가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주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손자병법을 인용하며 제갈량이 병법에 능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과 장략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고 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제갈량이 손자의 이 구절을 몰랐을까요?

손자병법은 이미 조조가 주석을 달 정도로 삼국지 시대에 널리 알려진 병서였습니다.

제갈량은 이 손자병법을 당연히 알고 있었고, 많은 연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병귀신속, 병문졸속에 따르지 않았을까요?

 

1차 북벌에서는 확실히 손자병법의 장점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위나라는 유비가 죽자 '촉에 더 이상 장수가 없다고 생각'해 전혀 방비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제갈량은 '두배의 적을 분리시킨 후 ', '뜻하지 않은 곳으로 나아가', '적의 땅에서 식량을 취하'려고 했습니다.

조운이 양동으로 위나라의 주력을 붙든 사이, 기산으로 나아가니 양주일대가 동요하고 3군이 호응하였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손자병법에 따른 움직임입니다.

 

이 북벌이 실패하고 제갈량은 이렇게 말합니다.

"군사와 장수를 줄이고, 벌을 분명히 하고 과오를 반성하여, 장래에 능히 변통할 수 있는 방안을 헤아리려 하오."

손자병법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능히 변통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자병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자병법이 손자병법보다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1차 북벌 후 촉한의 상황이 오자병법을 적용하기에 더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이 손자병법을 읽을 수 있었다면, 자연히 오자병법도 읽었을 것입니다.

오자병법은 손자보다는 상대적으로 준비를 철저히하고 군사를 움직이는 요령을 가르칩니다.

이제 그 변통할 수 있는 방안이 어떤 것인지 오자병법을 살펴봅시다.

 

오자병법의 오기는 76회의 큰 전투를 치뤄 64승 12무 무패라는 전적을 거두었습니다.

오기가 육성한 군대는 무졸(武卒)이라고 불리는 정예 중보병대였습니다.

이 무졸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 칼, 쇠뇌, 화살50개, 3일치 식량을 휴대한 채 100리를 행군하는 정예병입니다.

오늘날 일반 보병이 소총과 탄띠, 방탄모로 무장하고 완전군장을 한채 행군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사람들은 영양상태나 체격, 장비의 중량 등 모든 면에서 현대보다 불리한데 그것이 가능한 정예보병,

이것은 국가에서 총력을 기울여 육성한 정예 중에 정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만든 촉한의 군대를 보면 확실히 무졸이 떠오릅니다.

얼마 없지만 기록에 남은 촉한의 군대를 보면,

노를 잘 다루는 특수병, 힘센 청강병을 포함한 무당비군, 백이병 등 유독 정예보병과 궁병에 관한 기록이 존재하며,

제갈노, 목우유마와 같은 군사장비 개량에 힘쓴 내용이 있습니다.

또한, 가장 핵심적인 군사훈련법으로 팔진도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제갈량버젼의 무졸이 바로 팔진도를 익힌 정예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은 팔진도를 완성한 이후 "다시는 패배하는 일이 없을 것" 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칩니다.

 

이렇게 양성한 정예병을 사용할 때 가장 주의해야할 것은 비전투 손실입니다.

정예병이 야전에서 적과 싸울 때 교환비가 뛰어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비전투 손실은 정예병과 신병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일어납니다.

특히 험한 산지를 행군할 때 완전무장한 정예병이 경무장한 일반병보다 더 힘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갈량의 정예병을 상대로 위나라는 회전을 피하고 비전투손실을 강요했고,

정예병을 불리한 조건에서 소모시킬 수 없었던 제갈량은 불승불패의 국면을 유지한 채 퇴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정예병은 그야말로 촉한의 모든 것이 결집된 정수인데, 제갈량은 분명 이 판돈을 들고 도박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먼저 군대를 일으켜 강대한 위나라를 선공했으니까요.

이것이 도박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는 냉정하게 확률을 계산하는 승부사였으며,

이 돈이 자기 돈이 아니라 유비네 집안의 돈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갈량은 승산이 낮을 때는 판돈을 다시 거두어 들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판돈을 만들기위해 그와 촉한이 기울인 노력을 생각하면, 도저히 '올인'을 외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수양제와 한국언론

역사/동양사 2023. 3. 26. 09:02 Posted by 闖

113만 대군의 고구려 원정으로 유명한 수양제는, 

원정이 실패한 후 전형적인 유아퇴행증상을 보인다.

즉, 듣기 싫은 말은 안 듣고 듣고 싶은 말만 들었다.

 

도적이 날뛴다는 보고를 들으면 오히려 거짓말이라며 벌을 주었고,

그러다 보니 도시가 함락되고 군영이 무너져도 수양제에게 보고가 되지 않았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남은 군사력을 총동원해 일시적으로 도적을 항복시킨 적이 있었는데,

항복한 도적의 숫자가 수십만에 이르자 역시 거짓말이라며 오히려 장수를 해임시켰다.

그 결과는 뭐...결국 수나라는 망하고 수양제도 반란군에게 죽음을 당했다.

 

한국언론의 신뢰도가 박살난지는 오래되었다.

그래도 열심히 나팔을 불어줴치는데, 이는 들어주는 사람의 잘못도 크다.

막말로 돈이 되니까 헛나팔을 부는 것인데, 수양제 수준이니까 이런 언론에 부화뇌동하는 것이다.

생각있는 사람이야 이러다 나라 망하겠다고 한탄하지만,

나라가 망하건 말건 제 신나면 그만이라는 사람도 많다.

 

이쯤되면 사실 언론의 공공재적 기능은 이미 도도새의 박제 정도로만 남고 다 죽었다고 본다.

ai의 뉴스생산을 훨씬 신뢰할 수 있는 시대가 이미 왔으니, 언론 자체도 박물관행이 머지 않았다.

다만 기억할 것은, 거짓정보를 좋아하던 수양제는 결국 거짓정보를 제공해주던 간신배의 반란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언론도 구라를 치다치다 도저히 안될 것 같으면 가장 먼저 깃발을 바꿔달 것이 분명하다.

 

속지말자.

 

 

송나라가 주는 진짜 교훈

역사/동양사 2019. 1. 3. 08:23 Posted by 闖

 뉴스기사를 읽다가, 역사를 가지고 곡학아세하는 글이 있기에 이 글을 쓴다. 무슨 글인고 하니, [산업혁명 500년 전, 영국보다 잘 살았던 송나라는 왜 망했나]하는 글인데, 송나라 사례를 들어서 문재인정부를 은근히 공격하고 있다. "문재인, 이념을 쫓는 좌파 니들이 바로 지금의 도학정치가 들이다. 니들 때문에 경제가 망한다" 이게 바로 유성운씨가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도학 정치가들의 발목 잡기 산업혁명 목전에서 내리막https://news.v.daum.net/v/20190103000502617


 진짜 송나라가 도학정치 때문에 산업혁명을 못하고 망했을까? 아니, 송나라가 도학정치를 한 건 정말일까? 정말 그렇다면, 도학정치를 한 도학정치를 한 송나라는 왜 중국 역사상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 


 송나라, 이 기사에 언급된 산업혁명 직전의 송나라는 북송일 것이다. 북송이 망한 원인은 물론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렇다 할 결정적인 원인은 없다. 딱히 망해야 해서 망한 나라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완전히 망하지 않고 남송을 이어갈 수 있었다. 북송이 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금나라와의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도학정치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도의를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금나라태조는 맹약에 충실했지만 송은 도의를 무시했다. 휘종처럼 정치에 관심이 없는 예술가 황제 밑에 채경과 동관 같은 신념이 부족한 인물이 정권을 쥐었으니 당연했다...(중략)...금은 송의 배신행위에 분노했다...(중략)...금군은 마침내 개봉성을 함락했다.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살림출판사> 


 도학정치의 송나라. 도학이라는 말이 주는 몽상가적 늬앙스를 빼고나면, 이것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확실히 송나라는 사대부를 우대했다. 사대부의 목표인 관료의 수와 봉급은 송나라 때가 가장 많았다. 이전 시대의 당나라와 오대는 군인들이 설쳐서 망했기 때문에, 반대로 문(文)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렇게 사대부를 키운 송나라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도학정치 때문에 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북송과 같이 사대부를 우대한 남송은 몽골(원)에 의해 망했는데, 결코 허무하게 망하지 않았다. 당시 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몽골의 주력군을 상대로 칸을 전사시키는 등, 수십년을 끈질기게 버틴 끝에, 애산전투를 끝으로 그야말로 사대부의 나라답게 장렬하게 망했다. 당시 몽골군의 전설적인 전투력을 감안하면, 이거야 말로 사대부를 키운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도학정치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천상의 죽음과 전겸익의 투항을 돌아보면, 사대부를 우대한 송나라와 똥파리 취급한 명나라의 마지막 사대부가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도학정치 때문에 송이 망했다는 이야기에 대한 반박은 이쯤해두고, 이번에는 도학 때문에 민생이 파탄났다는 주장을 보자. 은근슬쩍 산업혁명 운운하면서 마치 도학 때문인 것 경제가 파탄 난 것 같은 늬앙스를 흘리고 있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문재인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쓴 것이다. 아주 악날한 붓끝이다.

 북송의 경제는 융성하기 그지 없어서, 수도였던 개봉성은 불야성이었다. 대도시가 불야성 수준이 되려면 귀족들만 불을 켠다고 될 일이 아니어서, 서민층의 활력이 넘치는 시대였다. 사대부만의 나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산업혁명에 이르지 못한 것은 아직 인류가 그 단계에 도달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12세기 북송 VS 18세기 산업혁명)였기 때문이지 딱히 상업의 자유가 없거나 사법이 불공평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조건이 갖춰 진다고 반드시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진화는 다양한 요인의 결합과 우연의 산물이다. 또 산업혁명 시기의 영국도 딱히 사법제도가 공정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지금도 사법제도가 유전무죄 무전유죄인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덧붙여, 수호전의 배경이 북송이었던 것은, 남송을 멸망시킨 원나라에서 의도적으로 사대부를 탄압했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정치보다는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사대부는 관리가 되어야 하는데, 몽골왕조에서 한족관료가 고위관료가 되기는 어려웠다.) 소설을 쓰자니 자연히 원나라를 배경으로 하면 목이 잘릴 것이고, 그 이전 시대인 송나라를 배경으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 특별히 송나라 때 민중들이 더 살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어처구니 없는 것은, 중국이 이후 성장하지 못하고 침체한 것을 모두 송나라 도학의 후유증으로 돌리고 있는데, 심해도 너무 심했다. 역시 이명박근혜 10년동안 이게 다 노무현때문이다를 외치던 보수의 전매특허라고 해야할까? 여기서 중국의 성쇠를 다 논할 수는 없고, 북송의 경제침체에 대해서만 간단히 보자.  

 북송의 경제가 융성했지만, 재정지출 역시 막심해서 결국 개혁을 해야할 시기가 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신법, 왕안석의 개혁시도였다. 이 개혁시도가 실패한 것은 딱히 개혁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신법을 시행했다가 철폐했다가 다시 시행했다가 하는 등, 오락가락 했기 때문이다. 정책의 일관성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송나라 역사가 정부와 여당에 주는 진짜 교훈이다.

 

 

임시정부의 귀국

역사/한국사 2018. 2. 26. 19:59 Posted by 闖
 해방 후 혼란의 극치를 달리던 정국하에서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귀국하였다는 대목을 읽던 중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전략)...미군정 당국자들은...하지의 짤막한 성명이 방송을 타자마자 서대문 방면으로 몰려드는 인파를 보며 그들도 놀랐을 것이다...(중략)...일본의 식민지배가 언제 끝이 날지, 과연 끝이 나기나 할지, 내다볼 길 없는 수십년 동안 한결같이 해방과 독립을 바라보며 객고를 견뎌온 사람들이 있다. 이사람들 말고 누구에게 독립의 길을 묻는단 말인가?  

『김기협, 해방일기, 너머북스』중에서


 임시정부의 그 고난의 세월을 생각하며 울지 않을 수 없었고, 해방 후 좌우남북이 갈라져 혼란한 그 시기에 임정이 이 상황을 타개해주리라 기대해 서대문의 경교장으로 몰려갔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안타까움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추천]밖에서 본 한국사

역사/한국사 2017. 8. 1. 19:17 Posted by 闖

 역사를 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관점이다. 같은 역사적 사실이라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고 의미가 달라지고 평가가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한국인은 좀 밖에서, 그러니까 비한국적인 관점에서 한국사를 볼 필요가 있다. 축구국가대표팀을 무조건 응원하는 관점이 아닌, 냉철한 도박사의 시점에서 관찰해보는 것이다. 서울대의 3대천재 중 한사람으로 알려진 역사학자 김기협의 [밖에서 본 한국사]는 그런 책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민족*은 위기 때마다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해 왔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유사이래 주변 이민족을 흡수해온 중국세력에 흡수되지 않고 한반도에서 생존해올 수 있었던 비결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바다(대만), 산맥(위구르, 티벳), 사막(몽골) 같은 자연조차 결국 중국의 확장을 저지하지 못했다. 중국의 중심에서 가장 가까운 이민족인 한민족이 지금까지 흡수되지 않은 것은 조화의 생존전략이 주효했던 것이다. 


요즘 같이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한반도에서 부딪힐 때, 조화의 전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밖에서 한 번 들여다 보면 어떨까?


*저자는 국가보다 민족의 관점을 중시한다. 

 인간의 생존본능은 강렬하기 이를데 없지만, 어처구니 없이 죽음을 바라는 일도 흔히 있다. 이 중 널리 알려진 것이 '베르테르 효과'이다. 소설 속 캐릭터의 자살에 공감한 나머지 모방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인공 베르테르의 이름을 딴 효과인데,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모방자살은 아마 '전횡(田橫)'을 따라 죽은 500명일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전횡은 초한쟁패기의 인물로 제나라 왕까지 된 인물이지만, 한신에 의해 제나라가 망하면서 500명의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작은 섬으로 도망쳤다. 짐작컨데 전횡은 자존심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의 자존심은 기록으로 드러난다. 천하를 통일한 한고조 유방이 제나라 지역의 안정을 위해 전횡을 용서하고 벼슬을 주려고 불렀는데, "예전에는 한왕이랑 나랑 같은 왕이었는데, 이젠 한왕은 천자가 되고 난 신하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게다가 한왕의 신하 중에는 내가 형을 삶아죽인 사람도 있는데 같은 군주를 섬기는 것도 부끄럽다."라고 말하고는 자살해 버린다. 참으로 꼬장꼬장한 성격이다.


 여기서부터는 베르테르 효과가 일파만파로 번져간다. 전횡의 시체를 유방에게 전해준 전횡의 부하 2명도 전횡의 장례가 끝나자 자살해 버리고, 이 소식이 섬에 남아있던 500명에게 전해지자 그들도 자살해 버린다. 사마천은 이에 관해서 "전횡의 절개는 고상해서 빈객들마저 의리를 사모해 따라 죽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실 베르테르효과에 군중심리가 더해진 것이지 딱히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전횡과 2명의 자살소식을 섬의 500명이 함께 들었을 것이다. 동시는 아닐지라도 같은 시기에 듣고 함께 모여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상의했을 것이다. 그 슬픔의 현장에 성질 급하고 감수성 풍부한 사람이 분연히 일어나 목을 그어 죽고, 여기에 동조해서 하나 둘씩 자살하기 시작한다. 어어~하는 사이 자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에라이~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나온다. 별로 자살할 생각까진 없던 사람도 분위기와 감정에 휩쓸려서 목을 긋는다. 


 물론 기록된 것처럼 500명 전원이 자살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소수의 '아 이건 좀 거시기한데?'하고 꽁무니를 뺀 피가 차가운 친구들도 있을 것이니까. 그러나 역사기록은 전원자살로 해서 아름답게 포장한다. 보라, 이 얼마나 장엄한 죽음인가? 그러니 생명보다는 충성과 의리가 중요하다, 이런 메세지를 담고 있다. 이 메세지가 유용한 지배수단인 것은 일단 차치하고, 개인의 선택문제로 돌아가자.


 사실 그 순간에 냉정을 유지하면서 남아 있는 삶의 무게와 죽음의 가치를 저울질하기는 어렵다. 이게 가능한 사람은 공감능력이 부족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따뜻한 눈물과 끓는 피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 피와 눈물을 흘리며 죽어야 된다면 이건 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런 모순이야말로 인간사를 풍요롭게 해주는 요소이기 때문에 이해타산만 따지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 당신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인가, 아니면 다정다감한 베르테르인가?


 


  

 

나는 학창시절에 가난하여 원하는 책을 마음껏 살 수 없었다. 간혹 책을 대량으로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다름아닌 도서관 장서가 정리해고(?)되는 때다.  그러나 학교 중앙도서관은 이용객이 많아 이런 기회에도 정보가 빠르고 발품을 팔지 않으면 좋은 책을 찾기가 어렵다. 한번은 학과창고를 정리할 일이 있었는데, 낡은 책상과 의자, 기자재 사이로 몇 무더기의 책꾸러미를 발견하였다. 정리하다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가져가라 들은터라 이게 왠 떡이냐 하고 몇 권의 흥미로운 책을 가져왔다. 


서설이 길었다. 그 때 입수한 책에는 진순신이 쓴 중국역사인물 시리즈가 있었는데, 그 중 한선제에 관한 부분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한선제가 말하기를, 정치가 공평하고 재판이 이치에 맞으면 백성은 불만이 없고 안정된다.

-한서 순리전-


이것이 정평송리(政平訟理)이다. 당시에 실제 이 정송, 정치와 재판을 담당하는 자는 지방관(태수)으로 한선제는 업적을 올린 지방관을 자주 포상했다고 한다. 한선제는 유아기는 감옥에서 보냈으며, 성장기부터 즉위하기 직전 청년시절까지를 일반 서민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따라서 실제 서민들의 삶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한나라 시대의 정치는 지금의 곧 세금이다. 고대 정부의 정치란 세금을 어떻게 걷느냐 하는데 있는 것이니까 이 세금이 공평하게 징수해야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세금은 지금처럼 돈으로 납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적, 물적자원 모두를 포괄해서 징수했다. 여기서 불공평하면 국가가 흔들리게 된다. 재판이 이치에 맞아야 한다는 것은 당시 신분제 사회이므로 평등한 법적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상필벌로 잘잘못을 가리는 데 이치에 맞고 억울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가 평(平)이고 재판이 리(理)이다.


정평송리, 정평송리라, 2천년 전에 정평송리하였으니 이제는 정치와 재판 둘 다 공평하고 이치에 맞는 정송평리를 기대한다면 너무 큰 바람일까? 

티비를 켰는데 진(秦)이 천하를 통일한 과정을 설명하는 역사물이 상영중이었다.

진시황 이전의 진왕들의 업적을 설명하면서 그 진왕들이 시대적 사명, 과업을 잘 수행하였기에

진시황이 10년만에 천하통일을 달성했다는 이야기였다.

 

역사의 흐름을 보노라면 그 과업을 달성하여 역사에 획을 긋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실패하여 그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경우도 많았다.

진무왕이 감무와의 식양의 맹세를 잊어 의양을 얻지 못했더라면,

소양왕이 백기를 써서 장평대전 이기지 못했더라면,

여불위가 기화를 얻지 못했더라면, 

전국시대가 끝나고 중국이 통일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심지어 진나라가 쇠망하고 다른 나라가 통일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해방 직후의 시대적 과업은 독립국가의 건설, 새로운 정부 수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과업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독립 자체가 2차대전의 결과물이었기에, 미소에 의해 분단되었고

친일파는 그대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후 세대의 시대적 과업은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 재건, 발전...

한마디로 공업화(산업화 , Industration)였다.

이 과업은 성공하였다. 해방 직후의 시대적 과업이 해결하지 못한 틈을 이용해 

살아남아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공업화라는 시대적 과업을 달성하였다.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고 난 후의 서울의 봄.

이 시대의 과업은 민주화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수많은 피를 흘리고도 3당합당, DJP연합, 외환위기 등 힘든 과정을 거쳐

2003년 노무현의 당선으로 민주화의 정점을 찍었다.

모두들 이제 민주주의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렇게 생각했다.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하고도 곧 초한전쟁의 난세가 왔듯이

한국에도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는 금융위기로 촉발된 세계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불러온

경제적 어려움이 원인이다. 경제적 어려움은 공업화의 신화, 박정희를 무덤에서 불러내었다.

성공한 공업화가 어찌보면 민주화를 후퇴시킨 것이다.

 

박정희처럼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경부고속도로에 맞먹을 대운하를 파고자 했던 이명박,

그리고 지금은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정권을 잡고 있다.

한국인들이 이명박, 박근혜에게 바라는 것은 민주화가 아닌,

그들 자신의 주머니를 풍요롭게 해줄 제2의 공업화이다.

 

제2의 공업화, 즉 두번째 경제적 발전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복지국가라는 단어로 압축되는 안정된 사회일 것이다.

실제로 민주화로 정치적 권리를 획득했다고 생각한 인민이

경제적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는, 아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 시대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을까

독립정부 수립이라는 과업이 불완전했음에도 공업화에 성공한 것은

여러 요소가 결합된 것이라 짧게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냉전이라는 큰 시대적 흐름의 도움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민주화가 후퇴하는 지금 시대에, 복지국가를 달성할 수 있을까

세계경제가 장기침체의 늪에 빠져있기에, 이 과업은 근년간에는 달성이 힘들 것이다.

 

앞선 세대의 과업이 실패한다고해서 꼭 뒷세대의 과업이 실패하는 것은 아니며

과업에도 정해진 순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흐름은 있다. 역사의 흐름은 큰 틀에서는 앞으로 나아가는 흐름이다.

이 흐름을 타고 발전하는 민족이나 국가가 있는가 하면, 휩쓸려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즉, 진나라가 6국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다하더라도 중국의 지형이나

당시 중국문명의 발전단계 등을 고려했을 때 결국 하나로 통일 되었을 것이다.

항우가 이 흐름을 거꾸로 돌려보려 했지만, 유방의 한나라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고

이 후 중국은 진나라 사람, 초나라 사람, 제나라 사람 등등이 아닌

한족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이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진나라는 이 흐름을 잘 타서 승자가 되었고,

다른 6국도 역시 각기 기회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패자가 되었다.

내가 속해 있는 사회가 휩쓸려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카산드라 노릇을 하기 싫어 이만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