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0시에 기미가요를 틀고, 독립기념관장이 독립을 부정하는 광복절을 맞아, 씁쓸한 소회를 남긴다.

 

뉴라이트는 자기 조상들의 친일행적을 미화하기 위해, 조선은 망해야 할 나라, 대한민국은 48년에 새로 건국되었다고 주장한다.

 

좋다.

 

이미 그들의 나라인데, 망한 나라의 국민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래서 나라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나라가 망하면, 독립운동가도 바보 취급을 받는다. 실패자.

 

수천년 후, 우리는 어떤 나라에 살았으며, 어떤 사람들이었다고 기억될까?

 

하나 예를 들어보자.

 

상주혁명.

 

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섰다. 천명을 새롭게 받은 주나라. 천명을 잃은 상나라는 바보취급을 당했다.

 

논어, 맹자, 장자...성현의 경전에도 상나라 사람은 늘 바보로 나온다. 그 책들에서 상나라 유민이 세운 나라(송나라)는 늘 바보역할이다. 송양지인, 유명하지 않은가? 조선놈은 안된다. 뭐 그런 이야기와 비슷한 것.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렇게 한 줄 써서 반항을 해본다. 우리나라 아직 안 망했다고-

 

제갈량이 왜 모험적인 전략을 취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제가 가장 동의하는 대전제는 그가 군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중텐의 설명인데, 유비와 같은 군주는 나라를 걸고 도박을 할 수 있지만

월급사장인 제갈량은 나라를 걸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 덧붙여서, 저는 저 나름대로 제갈량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근거를 하나 더 써보려고 합니다.

 

손자병법에 병귀신속이라, 좀 부족하더라도 재빨리 치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갈량의 북벌은 이 점이 부족했기에 매번 강대국 위나라가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주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손자병법을 인용하며 제갈량이 병법에 능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과 장략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고 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제갈량이 손자의 이 구절을 몰랐을까요?

손자병법은 이미 조조가 주석을 달 정도로 삼국지 시대에 널리 알려진 병서였습니다.

제갈량은 이 손자병법을 당연히 알고 있었고, 많은 연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병귀신속, 병문졸속에 따르지 않았을까요?

 

1차 북벌에서는 확실히 손자병법의 장점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위나라는 유비가 죽자 '촉에 더 이상 장수가 없다고 생각'해 전혀 방비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제갈량은 '두배의 적을 분리시킨 후 ', '뜻하지 않은 곳으로 나아가', '적의 땅에서 식량을 취하'려고 했습니다.

조운이 양동으로 위나라의 주력을 붙든 사이, 기산으로 나아가니 양주일대가 동요하고 3군이 호응하였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손자병법에 따른 움직임입니다.

 

이 북벌이 실패하고 제갈량은 이렇게 말합니다.

"군사와 장수를 줄이고, 벌을 분명히 하고 과오를 반성하여, 장래에 능히 변통할 수 있는 방안을 헤아리려 하오."

손자병법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능히 변통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자병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자병법이 손자병법보다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1차 북벌 후 촉한의 상황이 오자병법을 적용하기에 더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이 손자병법을 읽을 수 있었다면, 자연히 오자병법도 읽었을 것입니다.

오자병법은 손자보다는 상대적으로 준비를 철저히하고 군사를 움직이는 요령을 가르칩니다.

이제 그 변통할 수 있는 방안이 어떤 것인지 오자병법을 살펴봅시다.

 

오자병법의 오기는 76회의 큰 전투를 치뤄 64승 12무 무패라는 전적을 거두었습니다.

오기가 육성한 군대는 무졸(武卒)이라고 불리는 정예 중보병대였습니다.

이 무졸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 칼, 쇠뇌, 화살50개, 3일치 식량을 휴대한 채 100리를 행군하는 정예병입니다.

오늘날 일반 보병이 소총과 탄띠, 방탄모로 무장하고 완전군장을 한채 행군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사람들은 영양상태나 체격, 장비의 중량 등 모든 면에서 현대보다 불리한데 그것이 가능한 정예보병,

이것은 국가에서 총력을 기울여 육성한 정예 중에 정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만든 촉한의 군대를 보면 확실히 무졸이 떠오릅니다.

얼마 없지만 기록에 남은 촉한의 군대를 보면,

노를 잘 다루는 특수병, 힘센 청강병을 포함한 무당비군, 백이병 등 유독 정예보병과 궁병에 관한 기록이 존재하며,

제갈노, 목우유마와 같은 군사장비 개량에 힘쓴 내용이 있습니다.

또한, 가장 핵심적인 군사훈련법으로 팔진도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제갈량버젼의 무졸이 바로 팔진도를 익힌 정예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은 팔진도를 완성한 이후 "다시는 패배하는 일이 없을 것" 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칩니다.

 

이렇게 양성한 정예병을 사용할 때 가장 주의해야할 것은 비전투 손실입니다.

정예병이 야전에서 적과 싸울 때 교환비가 뛰어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비전투 손실은 정예병과 신병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일어납니다.

특히 험한 산지를 행군할 때 완전무장한 정예병이 경무장한 일반병보다 더 힘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갈량의 정예병을 상대로 위나라는 회전을 피하고 비전투손실을 강요했고,

정예병을 불리한 조건에서 소모시킬 수 없었던 제갈량은 불승불패의 국면을 유지한 채 퇴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정예병은 그야말로 촉한의 모든 것이 결집된 정수인데, 제갈량은 분명 이 판돈을 들고 도박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먼저 군대를 일으켜 강대한 위나라를 선공했으니까요.

이것이 도박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는 냉정하게 확률을 계산하는 승부사였으며,

이 돈이 자기 돈이 아니라 유비네 집안의 돈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갈량은 승산이 낮을 때는 판돈을 다시 거두어 들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판돈을 만들기위해 그와 촉한이 기울인 노력을 생각하면, 도저히 '올인'을 외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수양제와 한국언론

역사/동양사 2023. 3. 26. 09:02 Posted by 闖

113만 대군의 고구려 원정으로 유명한 수양제는, 

원정이 실패한 후 전형적인 유아퇴행증상을 보인다.

즉, 듣기 싫은 말은 안 듣고 듣고 싶은 말만 들었다.

 

도적이 날뛴다는 보고를 들으면 오히려 거짓말이라며 벌을 주었고,

그러다 보니 도시가 함락되고 군영이 무너져도 수양제에게 보고가 되지 않았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남은 군사력을 총동원해 일시적으로 도적을 항복시킨 적이 있었는데,

항복한 도적의 숫자가 수십만에 이르자 역시 거짓말이라며 오히려 장수를 해임시켰다.

그 결과는 뭐...결국 수나라는 망하고 수양제도 반란군에게 죽음을 당했다.

 

한국언론의 신뢰도가 박살난지는 오래되었다.

그래도 열심히 나팔을 불어줴치는데, 이는 들어주는 사람의 잘못도 크다.

막말로 돈이 되니까 헛나팔을 부는 것인데, 수양제 수준이니까 이런 언론에 부화뇌동하는 것이다.

생각있는 사람이야 이러다 나라 망하겠다고 한탄하지만,

나라가 망하건 말건 제 신나면 그만이라는 사람도 많다.

 

이쯤되면 사실 언론의 공공재적 기능은 이미 도도새의 박제 정도로만 남고 다 죽었다고 본다.

ai의 뉴스생산을 훨씬 신뢰할 수 있는 시대가 이미 왔으니, 언론 자체도 박물관행이 머지 않았다.

다만 기억할 것은, 거짓정보를 좋아하던 수양제는 결국 거짓정보를 제공해주던 간신배의 반란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언론도 구라를 치다치다 도저히 안될 것 같으면 가장 먼저 깃발을 바꿔달 것이 분명하다.

 

속지말자.

 

 

송나라가 주는 진짜 교훈

역사/동양사 2019. 1. 3. 08:23 Posted by 闖

 뉴스기사를 읽다가, 역사를 가지고 곡학아세하는 글이 있기에 이 글을 쓴다. 무슨 글인고 하니, [산업혁명 500년 전, 영국보다 잘 살았던 송나라는 왜 망했나]하는 글인데, 송나라 사례를 들어서 문재인정부를 은근히 공격하고 있다. "문재인, 이념을 쫓는 좌파 니들이 바로 지금의 도학정치가 들이다. 니들 때문에 경제가 망한다" 이게 바로 유성운씨가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도학 정치가들의 발목 잡기 산업혁명 목전에서 내리막https://news.v.daum.net/v/20190103000502617


 진짜 송나라가 도학정치 때문에 산업혁명을 못하고 망했을까? 아니, 송나라가 도학정치를 한 건 정말일까? 정말 그렇다면, 도학정치를 한 도학정치를 한 송나라는 왜 중국 역사상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 


 송나라, 이 기사에 언급된 산업혁명 직전의 송나라는 북송일 것이다. 북송이 망한 원인은 물론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렇다 할 결정적인 원인은 없다. 딱히 망해야 해서 망한 나라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완전히 망하지 않고 남송을 이어갈 수 있었다. 북송이 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금나라와의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도학정치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도의를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금나라태조는 맹약에 충실했지만 송은 도의를 무시했다. 휘종처럼 정치에 관심이 없는 예술가 황제 밑에 채경과 동관 같은 신념이 부족한 인물이 정권을 쥐었으니 당연했다...(중략)...금은 송의 배신행위에 분노했다...(중략)...금군은 마침내 개봉성을 함락했다.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살림출판사> 


 도학정치의 송나라. 도학이라는 말이 주는 몽상가적 늬앙스를 빼고나면, 이것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확실히 송나라는 사대부를 우대했다. 사대부의 목표인 관료의 수와 봉급은 송나라 때가 가장 많았다. 이전 시대의 당나라와 오대는 군인들이 설쳐서 망했기 때문에, 반대로 문(文)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렇게 사대부를 키운 송나라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도학정치 때문에 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북송과 같이 사대부를 우대한 남송은 몽골(원)에 의해 망했는데, 결코 허무하게 망하지 않았다. 당시 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몽골의 주력군을 상대로 칸을 전사시키는 등, 수십년을 끈질기게 버틴 끝에, 애산전투를 끝으로 그야말로 사대부의 나라답게 장렬하게 망했다. 당시 몽골군의 전설적인 전투력을 감안하면, 이거야 말로 사대부를 키운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도학정치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천상의 죽음과 전겸익의 투항을 돌아보면, 사대부를 우대한 송나라와 똥파리 취급한 명나라의 마지막 사대부가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도학정치 때문에 송이 망했다는 이야기에 대한 반박은 이쯤해두고, 이번에는 도학 때문에 민생이 파탄났다는 주장을 보자. 은근슬쩍 산업혁명 운운하면서 마치 도학 때문인 것 경제가 파탄 난 것 같은 늬앙스를 흘리고 있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문재인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쓴 것이다. 아주 악날한 붓끝이다.

 북송의 경제는 융성하기 그지 없어서, 수도였던 개봉성은 불야성이었다. 대도시가 불야성 수준이 되려면 귀족들만 불을 켠다고 될 일이 아니어서, 서민층의 활력이 넘치는 시대였다. 사대부만의 나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산업혁명에 이르지 못한 것은 아직 인류가 그 단계에 도달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12세기 북송 VS 18세기 산업혁명)였기 때문이지 딱히 상업의 자유가 없거나 사법이 불공평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조건이 갖춰 진다고 반드시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진화는 다양한 요인의 결합과 우연의 산물이다. 또 산업혁명 시기의 영국도 딱히 사법제도가 공정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지금도 사법제도가 유전무죄 무전유죄인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덧붙여, 수호전의 배경이 북송이었던 것은, 남송을 멸망시킨 원나라에서 의도적으로 사대부를 탄압했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정치보다는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사대부는 관리가 되어야 하는데, 몽골왕조에서 한족관료가 고위관료가 되기는 어려웠다.) 소설을 쓰자니 자연히 원나라를 배경으로 하면 목이 잘릴 것이고, 그 이전 시대인 송나라를 배경으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 특별히 송나라 때 민중들이 더 살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어처구니 없는 것은, 중국이 이후 성장하지 못하고 침체한 것을 모두 송나라 도학의 후유증으로 돌리고 있는데, 심해도 너무 심했다. 역시 이명박근혜 10년동안 이게 다 노무현때문이다를 외치던 보수의 전매특허라고 해야할까? 여기서 중국의 성쇠를 다 논할 수는 없고, 북송의 경제침체에 대해서만 간단히 보자.  

 북송의 경제가 융성했지만, 재정지출 역시 막심해서 결국 개혁을 해야할 시기가 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신법, 왕안석의 개혁시도였다. 이 개혁시도가 실패한 것은 딱히 개혁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신법을 시행했다가 철폐했다가 다시 시행했다가 하는 등, 오락가락 했기 때문이다. 정책의 일관성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송나라 역사가 정부와 여당에 주는 진짜 교훈이다.

 

 

 인간의 생존본능은 강렬하기 이를데 없지만, 어처구니 없이 죽음을 바라는 일도 흔히 있다. 이 중 널리 알려진 것이 '베르테르 효과'이다. 소설 속 캐릭터의 자살에 공감한 나머지 모방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인공 베르테르의 이름을 딴 효과인데,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모방자살은 아마 '전횡(田橫)'을 따라 죽은 500명일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전횡은 초한쟁패기의 인물로 제나라 왕까지 된 인물이지만, 한신에 의해 제나라가 망하면서 500명의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작은 섬으로 도망쳤다. 짐작컨데 전횡은 자존심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의 자존심은 기록으로 드러난다. 천하를 통일한 한고조 유방이 제나라 지역의 안정을 위해 전횡을 용서하고 벼슬을 주려고 불렀는데, "예전에는 한왕이랑 나랑 같은 왕이었는데, 이젠 한왕은 천자가 되고 난 신하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게다가 한왕의 신하 중에는 내가 형을 삶아죽인 사람도 있는데 같은 군주를 섬기는 것도 부끄럽다."라고 말하고는 자살해 버린다. 참으로 꼬장꼬장한 성격이다.


 여기서부터는 베르테르 효과가 일파만파로 번져간다. 전횡의 시체를 유방에게 전해준 전횡의 부하 2명도 전횡의 장례가 끝나자 자살해 버리고, 이 소식이 섬에 남아있던 500명에게 전해지자 그들도 자살해 버린다. 사마천은 이에 관해서 "전횡의 절개는 고상해서 빈객들마저 의리를 사모해 따라 죽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실 베르테르효과에 군중심리가 더해진 것이지 딱히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전횡과 2명의 자살소식을 섬의 500명이 함께 들었을 것이다. 동시는 아닐지라도 같은 시기에 듣고 함께 모여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상의했을 것이다. 그 슬픔의 현장에 성질 급하고 감수성 풍부한 사람이 분연히 일어나 목을 그어 죽고, 여기에 동조해서 하나 둘씩 자살하기 시작한다. 어어~하는 사이 자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에라이~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나온다. 별로 자살할 생각까진 없던 사람도 분위기와 감정에 휩쓸려서 목을 긋는다. 


 물론 기록된 것처럼 500명 전원이 자살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소수의 '아 이건 좀 거시기한데?'하고 꽁무니를 뺀 피가 차가운 친구들도 있을 것이니까. 그러나 역사기록은 전원자살로 해서 아름답게 포장한다. 보라, 이 얼마나 장엄한 죽음인가? 그러니 생명보다는 충성과 의리가 중요하다, 이런 메세지를 담고 있다. 이 메세지가 유용한 지배수단인 것은 일단 차치하고, 개인의 선택문제로 돌아가자.


 사실 그 순간에 냉정을 유지하면서 남아 있는 삶의 무게와 죽음의 가치를 저울질하기는 어렵다. 이게 가능한 사람은 공감능력이 부족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따뜻한 눈물과 끓는 피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 피와 눈물을 흘리며 죽어야 된다면 이건 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런 모순이야말로 인간사를 풍요롭게 해주는 요소이기 때문에 이해타산만 따지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 당신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인가, 아니면 다정다감한 베르테르인가?


 


  

 

나는 학창시절에 가난하여 원하는 책을 마음껏 살 수 없었다. 간혹 책을 대량으로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다름아닌 도서관 장서가 정리해고(?)되는 때다.  그러나 학교 중앙도서관은 이용객이 많아 이런 기회에도 정보가 빠르고 발품을 팔지 않으면 좋은 책을 찾기가 어렵다. 한번은 학과창고를 정리할 일이 있었는데, 낡은 책상과 의자, 기자재 사이로 몇 무더기의 책꾸러미를 발견하였다. 정리하다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가져가라 들은터라 이게 왠 떡이냐 하고 몇 권의 흥미로운 책을 가져왔다. 


서설이 길었다. 그 때 입수한 책에는 진순신이 쓴 중국역사인물 시리즈가 있었는데, 그 중 한선제에 관한 부분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한선제가 말하기를, 정치가 공평하고 재판이 이치에 맞으면 백성은 불만이 없고 안정된다.

-한서 순리전-


이것이 정평송리(政平訟理)이다. 당시에 실제 이 정송, 정치와 재판을 담당하는 자는 지방관(태수)으로 한선제는 업적을 올린 지방관을 자주 포상했다고 한다. 한선제는 유아기는 감옥에서 보냈으며, 성장기부터 즉위하기 직전 청년시절까지를 일반 서민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따라서 실제 서민들의 삶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한나라 시대의 정치는 지금의 곧 세금이다. 고대 정부의 정치란 세금을 어떻게 걷느냐 하는데 있는 것이니까 이 세금이 공평하게 징수해야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세금은 지금처럼 돈으로 납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적, 물적자원 모두를 포괄해서 징수했다. 여기서 불공평하면 국가가 흔들리게 된다. 재판이 이치에 맞아야 한다는 것은 당시 신분제 사회이므로 평등한 법적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상필벌로 잘잘못을 가리는 데 이치에 맞고 억울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가 평(平)이고 재판이 리(理)이다.


정평송리, 정평송리라, 2천년 전에 정평송리하였으니 이제는 정치와 재판 둘 다 공평하고 이치에 맞는 정송평리를 기대한다면 너무 큰 바람일까? 

주아부는 한나라 때 사람으로 오초칠국의 난을 평정한 대공신입니다.
이런 맹활약을 한 사람이 죽을 때는 반역죄로 몰려서 닷새동안 굶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자기생각을 종종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데..이 대목에서는 그냥 넘어가네요.저는 주아부의 죽음이 안타까워서 한마디 덧붙이려고 합니다.
일단, 주아부의 죽음의 전말을 살펴보죠.

[주아부의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위해 공관에게 갑옷과 방패 500을 사들여 장례 치를 준비를 시켰다. 그런데 아들이 심부름꾼에게 품삯을 주지 않자, 심부름꾼들이 그가 조정의 물건을 몰래 사들인 것을 고발해버렸다.
그 일에 주아부가 연루되어 황제가 일일이 문책하였으나, 주아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에 황제가 욕하면서 "너의 말은 필요없다." 하고는 정위에게 보냈다.
정위*가 문책하기를, "어찌하여 반역을 하려 하였소?"
주아부가 대답하기를, "신이 사들인 물건은 장사지낼 때 쓸 물건인데, 어찌 반역이라는 말을 하시오?"
이에 형리가 말하기를, "설사 살아서 땅 위에서 반역하려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죽어서 땅속에서라도 반역하려 했을 것이오!"
그리고 형리가 주아부를 더욱 가혹하게 대했다. 주아부는 닷새동안 먹지 않고 있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아들이 방어구를 사면서 세밀하지 못한데다가 조정의 물건을 몰래 샀으니 이 죄는 죽을 죄이나,
주아부를 연루시켜 반역으로 몬 것은 너무 가혹하다. 장례를 준비할 정도로 나이가 많은데다가 칼과 창을 준비한 것도 아니니 반역을 하려고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전에 이미 황제와 주아부는 흉노를 후로 책봉하는 문제에 의견이 달라 승상 주아부를 면직시킨 상태이니 이건 황제의 개인감정에 의한 반역죄가 아닌가? 이미 그 낌새를 관료들도 알고 있어서 대공신인 주아부를  일개 형리 따위가 말도 안되는 논리로 심문하고 없는 죄를 만들려고 했다. 마침내 주아부는 피를 토하고 죽었는데 이는 억울해서 분사한 것이다.

*정위 : 일종의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에 해당하는 관직. 

---------------------------

세월이 흘러 예전의 글을 읽어보니 아쉬운 점이 많다.

주아부의 죽음은 경제의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그의 공이 너무 크고 뒤를 이을 태자는 어렸기 때문이다.

경제는 주아부를 죽이고 1년 뒤에 죽는다. 다음 황제는 15세에 즉위한 한무제다.

그 당시에는 이런 정치적인 미묘함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짧게 생각했던 것이다.

"춘추"에 양나라를 멸망시킨 나라를 쓰지 않은 것은 양나라가 스스로 화를 불렀기 때문이다. 당초 양나라 백작은 자주 성을 쌓으면서도 성 안에 사람이 살게 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백성이 지친 나머지 견딜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양나라 백작은 늘 이같이 말하곤 했다.
"장차 어떤 도적이 쳐들어온다."
한번은 백작이 궁실 둘레에 해자를 팔 때 "진나라가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성이 두려워한 나머지 도주하고 말았다.

이 짧은 이야기의 교훈은 꽤 많습니다. 언듯 보아 양치기소년이 떠오르면서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는 교훈도 있는데...한 번 찬찬히 들여다 보죠.

성을 쌓는 이유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함인데, 정작 성 안에 보호받아야 할 백성을 살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챙기는 격이지요. 결국 적을 방어한다는 명분이 백작의 궁실을 보호할 때는 더 통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백성을 보호하지 않는 백작의 궁실을 방어해 줄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즉,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대신에 생긴 이득은 반드시 백성과 나누어야 다음에 또 고통을 분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백작이 늘 말하는 도적은 실제로 쳐들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에 쳐들어온다고 겁을 줄 도적은 이전의 도적보다 더 무서워야합니다. 이를테면, 자꾸 울면 늑대가 와서 물어간다~~한 다음에는 호랑이가 와서 물어간다~~고 해야 겁을 낸다는 거죠. 일종의 공포정치인데요. 여기서 진나라는 당시 양나라가 상대할 수 없는 강국이었기 때문에 성이 백개가 있다한들 막을 수 없었고 당연히 백성이 도망을 가고 맙니다. 이런 방식은 절대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금 한국을 보면 딱 양나라 꼴입니다. 경제가 어렵다고 국민에게 고통을 강요해서 수출경기를 살렸지만 정작 혜택은 국민에게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국민이 지친 나머지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대통령은 늘 "경제가 어렵다,  북한이 우리의 적이다"고 겁을 주면서 4대강사업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4대강사업은 양나라 백작의 궁실해자와 같습니다. 국민에게 이득이 되는 사업이 아니라 일부 토건족에 이익을 주는 사업이니까요.

지금부터라도 국민을 성 안에 들어가 살게해야 합니다. 즉, 분배와 복지를 강화하고 4대강사업을 중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부는 항상 정확한 정보를 국민에게 전달해야지 비밀주의에 빠져있어선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망했던 양나라의 뒤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