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묻건데 정이란 무엇인가?

문학 2021. 11. 18. 23:49 Posted by 闖

問世間情爲何物

문세간정위하물

 

세상에 묻건데 정이란 무엇인가?)

 

直敎生死相許

직교생사상허

 

바로 서로 삶과 죽음을 맡기는 것이다. 

 

원호문이 16세에 쓴 시라는데,

 

정말이지 천고의 시인으로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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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사회적(的) 돌도끼

문학 2019. 1. 17. 22:46 Posted by 闖

 부영(不逞)씨의 발걸음은 빠르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딴딴딴딴따라라란 행진곡에 맞춰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척척척척 걷게 되기 때문이다. 겨울의 추위와 미세먼지 덕분에 스쳐 지나는 사람도 온통 검은색 롱패딩에 마스크 차림이다. 최근 부영씨의 출근길은 늘 이렇다. 

 매일 아침 여덟시 사십분이면 회사로 가는 길에 있는 육교를 건너 상점가 사이의 좁은 길을 걷는다. 좁은 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소방차가 들어올 수 있을 만큼 큰 길이다. 왜 좁은 길인고 하니, 좌우로 주차된 차나 배달용 오토바이들 때문이다. 여덟시 사십분이 되었는데도 그대로 주차된 차들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해보기도 하지만 출근길의 빠듯함과 행진곡의 리듬에 맞추면 걸음을 늦추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간밤에 카페트 한장 정도 쌓인 눈(雪)이 얼어붙은 곳이 있어 신경이 쓰였다. 도시의 눈은 내리면서부터 검어지기 시작해서 구두 뒤축에 들러붙을 무렵이면 눈인지 타르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함부로 버린 담배꽁초나  담뱃진이 섞여서 일지도 모르지만, 어쨋든 불쾌한 걸음걸이가 되고 만다. 그러고 보면, 오늘 아침은 어제 먹고 남은 버거세트의 감자튀김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씹었던가, 김 빠진 사이다 만큼 짜증나는 것도 없는데, 오늘 저녁밥은, 냉장고에 남은게 있었던가, 하는 따위를 생각하다 보면 유쾌할 일이 점점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슬슬 말라빠진 감자튀김 따위는 잊고 다시 행진곡에 발을 맞춰볼까 하는 생각할 무렵이었다.


-빵빵-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바로 뒤에서 울렸다. 리듬에 맞춰 무릎에 살짝 힘이 들어가려던 참에, 흠칫하여 고개를 돌리자 좁은 길에서 차 두 대가 서로 마주보고 사이드 미러가 스칠듯 교차하는 중이었다., 경적을 울린 녀석은 - 아마도 바로 뒤에 다가오는 차일 것이다- 자기가 길 한 쪽으로 붙어 가는데 눈 앞에 사람이 걸어가니 -딱히 비둘기나 고양이 였어도 그랬겠지만- 울린 것일게다.  글쎄, 평소 같으면 자연스럽게 주차된 차들 사이의 틈으로 들어갔을 부영씨지만, 오늘은 다시 천천히 앞으로 고개를 돌려 그대로 걸었다. 딱히 길 한가운데를 걷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갑자기 경적이나 울려대는 놈에게 내가 왜 호의를 베풀어야 할까-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기 때문이다. 어째서인지 감자튀김 생각이 났다.

                

 몇 걸음 더 나가자 슈퍼마켓과 부동산중개사가 마주보고 있는 교차로가 나왔지만, 부영씨는 평소와 달리 아직 감자튀김의 불쾌한 식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사이 검은 실루엣이 부영씨의 왼쪽을 스쳐 바로 우회전을 하더니 부영씨의 바로 앞에서 급정지했다. 끼익--하고 타이어와 도로가 마찰하는 음이 이어폰의 음악을 뚫고 귀에 들렸다. 

 '사고인가?'

 일순 놀라 멍해진 부영씨는 멈춰섰다. 1초 정도 멈춰 있었을까? 주변에는 아무일도 없었다. 그리고 멈췄던 승용차가 그대로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차가 투수와 포수의 거리만큼 벌어지자 그제서야 보복운전을 당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찡그리며 멀어져 가는 차를 바라보았다. 그런 줄 알았으면 급정지할 때 넘어지는 척 뒷트렁크라도 내려칠 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부영씨는 생각했다. 왜 보복운전을 했을까? 아까 길을 비켜주지 않은 것 때문일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심한 것 같았다. 누가 타고 있었을까? 차 번호는 뭐였지?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한바탕 드잡이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그 차 안에 타고 있을 적(敵)을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해 괴롭히는 상상을 했다. 


 '문명인은 예의없이 굴어도 머리가 쪼개지지 않기 때문에 원시인보다 무례하다.'

 어디선가 읽은 문구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자연히 돌도끼로 승용차를 마구 내려치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순식간에 열두 번쯤 적의 머리를 쪼갠 부영씨는, 다시 평소와 같이 음악에 맞춰 척척척척 걸어갔다. 그렇다, 지금은 문명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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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앨범2의 섹스묘사와 하루키

문학 2018. 4. 17. 22:44 Posted by 闖

 화이트앨범2의 흔히 들을 수 있는 유저평가는 H씬이 몰입에 방해된다, 혹은 불필요하다는 평이다. 이런 평이 나오는 이유는 성인용 연애게임, 속칭 야겜에서 H씬은 목적 그 자체이고 그런 야겜에 익숙한 유저들에게 화이트앨범2가 주는 이질감 때문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화이트앨범2에서 H씬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고 문학적인 완성도를 높여주는 장치이다. 화이트앨범2 자체가 행복의 반대편에 있는, 버려지는 세츠나(혹은 카즈사)에 대한 죄책감에 빠뜨리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즉, 꼴리라고 만든 게임이 아니기에 꼴리는 게임에 익숙한 유저들에게 이질감을 주게된다.


 시나리오를 쓴 마루토 후미아키는 화이트앨범2가 무라카미 하루키소설처럼 느껴지도록 썼다. 주인공 이름부터가 하루키, 그리고 하루키소설에서 등장하는 무대장치인 음악-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속의 등장하는 음악을 들으며 읽도록 썼다.-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이야기, 그리고 상세하고 색정적이만 씁쓸한 섹스묘사. 이런 부분들이 화이트앨범2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느끼게 하는 요소이다.


 화이트앨범2에서 섹스씬을 읽으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유저는 섹스를 읽는 것이 아니라 하루키가 세츠나를 배신하는 것을 읽는 것이다. 섹스가 격렬하면 격렬할 수록, 세츠나는 더 깊이 상처받는다. 세츠나가 문 밖에 있는 것을 알고 카즈사와 입을 막고 성교할 때, 유저들은 미쳐버리지 않을 수 없다. 정상적인 사고회로를 가진 사람이라면 외면하고 싶은 장면이 되는 것이다.


 서브히로인인 치아키, 코하루, 마리와의 첫 섹스도 다 그랬다. 하루키는 여전히 세츠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치아키 때는 치아키의 술수에 휘둘려서, 코하루 때는 망가지려는 코하루를 지키기 위해, 마리 때는...(하루키XXX)...하여간 하루키와 유저가 느끼기에는 세츠나가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상태에서 다른 여인과 섹스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즈사루트에서 정작 카즈사와의 섹스신은 나오지 않고, 세츠나와의 격렬한 섹스신만 존재한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곧 카즈사를 선택할 하루키에게 있어서 세츠나와의 섹스 자체가 세츠나에 대한 가장 심한배신행위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는, 이미 하루키가 모든 것을 버리고 카즈사를 선택하기로 결정한 이상, 카즈사와의 섹스는 세츠나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하루키와 카즈사 만의 섹스가 되기 때문이다. 이 섹스신이야 말로 화이트앨범2에서는 불필요하고, 그래서 나오지 않는다. 바람루트에서 세츠나를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하루키와 카즈사의 섹스가 얼마나 둘을 망가뜨리고, 유저를 망가뜨리는지 생각해보라. 


 화이트앨범2의 섹스신을 읽으며 바지를 내릴 수는 없지만 육봉 대신 가슴을 움켜쥐게 되는 것이 작가의 본래 의도했던 바일 것이다. 몰입한 나머지 양손으로 양쪽을 동시에 움켜쥐고 가슴으로도 울고 전립선으로도 울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것대로 화이트앨범2를 제대로 즐긴 것이 아닐까? 


ホウイトアルバム2のセックスの描写と春樹


ホウイトアルバム2について、Hシーンがゲームに打ち込むのを邪魔するまたは要らないと言うのがよくあるユーザーの評判である。それは成人向けの恋愛ゲーム、つまりエロゲームではHシーンは目的その物であり、そのようなエロゲームに慣れているユーザーたちに与えられるホウイトアルバム2の気まずさのせいだと思う。


結論を言うと、ホウイトアルバム2にHシーンは不可欠な要素であり、文学的な完成度を高めさせる装置である。幸せの向こう側にある人、つまり捨てられる雪菜(またはかずさ)への罪悪感にのた打ち回れさせるのがホウイトアルバム2の目的であるからだ。つまり、勃起させるために作られたゲームがないから、勃起させるエロゲームに慣れているユーザーたちには気まずい。


シナリオを書けた丸戸史明さんはホウイトアルバム2が村上春樹の小説のように感じられるのを狙って書いたと思う。主人公の名が春希、そして春樹の小説の舞台装置である音楽(春樹の小説は小説中の音楽を聞きながら読むように書いてある。)を中心で進められるお話、そして詳しくて艶かしいけど、苦いセックスの描写。こんなのがウイトアルバム2で村上春樹を感じられるのだ。


ホウイトアルバム2のセックスシーンを読むときにもやもやするのも同然である。ユーザーはセックスを読むのではなく、春希が雪菜を裏切るのを読むんた。セックスが激しいなら激しいほど雪菜は傷つく。雪菜がドアの向こうにあるのを知った上で口を塞ぐかずさとのセックスの時、ユーザーは狂うしかない。正常な思考回路を持つ人間なら眼を逸らしたいシーンになるのた。


サーブヒロインの千晶と小春と麻理とのセックスもそうだった。春希は相変わらず雪菜を愛している。千晶の時は千晶に振り回され、小春の時は小春を守ろうとして、麻理の時はくそ春希め…とにかく春希とユーザーの感じでは雪菜の目の前で彼女たちとセックスをしたのと他ならない。


かずさルートではかずさとのセックスは出て来ない上、雪菜との激しいセックスシーンだけが存在する。一番の理由は、まもなくかずさを選ぶ春希にとっては雪菜とのセックスその事が雪菜に対する最も酷い裏切りであるからだ。二番目は、すでに全てを捨ててかずさを選んだ故にかずさとのセックスには雪菜の面影がなくなり、春希とかずさの2人のセックスになるからだ。こんなセックスシーンはホウイトアルバム2は要らないし、それで出て来ない。浮気ルートで雪菜が捨てられていない状態で春希とかずさのセックスがどれだけ二人を押し潰して、ユーザーをのたうち回せるのか考えてみろ。


ホウイトアルバム2のセックスシーンを読みながらズボンを下ろす事は出来ないけど肉棒の代わりに胸を捉まるのが作家の狙いだと思う。打ち込みすぎて両手で両方を同時に捉まえた途端、胸が泣いて前立腺も泣かせる羽目に成るかもしれないけど、それはそれでホウイトアルバム2をじゃんと楽しんでいたのではない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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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 감상

문학 2018. 1. 29. 00:47 Posted by 闖

 작년 오월, 일본 치바현 츠다누마역 호텔에 묵을 때, 역의 쇼핑몰에서 서점에 들렀다. 반쯤 마음먹고 있었기에 별 다른 망설임 없이 "騎士団長殺し:기사단장죽이기"상/하권을 골랐다. 점원이 북커버를 씌워 줄까 물어보기에, 한국에서 책을 사는 것과 달리 종이커버를 씌운 책을 사게 되었다. 일본인은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강하다. 일본에서 지하철 등에서 책을 읽는 모습은 스마트폰을 만지는 모습 만큼이나 자주 보게 되지만, 그 책의 제목을 보기는 힘들다. 다들 커버로 표지를 숨기기 때문이다. 전철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140cm정도의 작은 체구의 앳된 중학생이 열심히 읽던 -시기적으로 중간고사 중이었을텐데도-  "西部戦線異常無し:서부전선 이상없음." 외에는 제목을 볼 수 없었다. 이 역시 표지를 본 것이 아니라 페이지의 머릿글로 나온 작은 글씨를 슬쩍 보았던 것이다. 그 외에 "화이트앨범2"를 찾아봤지만 역시 오프라인서점에서 사기는 너무 늦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책을 샀으니 키타하라 하루키가 나오는 책도 사고 싶었지만,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니까.


 그렇게 2017년 5월에 산 두 권을 다 읽은 것이 2018년 1월이라니, 예전의 나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느긋함이었다. 12권짜리 장편소설도 밤을 세워가며 다 읽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왠지 조용한 방에서 읽고 싶지 않았다. 아마, 기왕에 북커버를 했으니 일본인들처럼 기차나 지하철, 버스에서 이동하는 동안 읽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이동 중에 짬짬이 읽다보니 반년이 넘게 걸렸다. 옆에서 누가 뭘 읽고 있으면 자연스레 신경이 쓰여 뭘 보나 했을텐데, 북커버를 씌웠기에 더 궁금해졌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에고는 충족된 것 같다. 


 기사단장 죽이기,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무엇인가일 것이다. 주인공은 언젠가 자신의 기사단장 죽이기-흰 스바루 포레스트의 남자-를 다시 그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화가로서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아니, 유즈와 무로, 마리에와의 인연으로 이미 그의 기사단장 죽이기는, 이데아든 메타포든 벌써 완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더 그리든 그리지 않든 주인공이 원하는 것은 벌써 손에 넣었으니까.

 주도면밀하고 목표가 분명하면서 추진력이 뛰어난 멘시키, 그러나 그의 기사단장 죽이기는 바로 ~일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밸런스를 잡은 채 살아가는 것이다. 애매모호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도면밀한, 그러나 그 애매모호함을 가까이두고 싶어하는 멘시키. 그가 굳이 마리에의 출신을 확인하고자 하지 않은 것은 충분한 계산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마리에가 그의 딸인지 확인하고자 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을 이 남자-멘시키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해서 어쩔 것인가? 자신의 딸이라고 해도 마리에에게 그 사실을 가지고 함께 살자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아니라면 멘시키에게 남는 것은 없다. 마리에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르는 상태야말로, 멘시키에게 골디락스의 상태인 것이다.  

 마리에, 13세의 소녀의 기사단장 죽이기는 가슴이 부푸는 것일게다. 그리고 65C 정도가 되면, 다락방에서 부엉이를 보며 주인공에 기대 흐느끼던 소녀는, 아마 기사단장은 잊어버리고 숙녀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화장기 없는 13세 소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주인공이 그린 미완의 초상화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뇌리에도. 이 소설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마리에의 흐느끼는 모습, 그리고 그 머리를 쓰다듬는 주인공의 모습이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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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감상

문학 2016. 10. 3. 22:29 Posted by 闖

 무슨 유명한 상을 받아 기삿거리가 됐었던 [채식주의자]라는 소설을 읽었다. 평소의 내 취향이라면 제목을 흘깃보고 지나치거나 한가하다면 첫문단 정도 읽고 내려놓았거나, 낯선 친척의 집에 갔을 때 서재 테이블에 놓여 있다면 누군가 부르러 올 때까지 읽었을 가능성이 있는 그런 정도의 제목이었다. 순수문학을 읽은 기억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인 내가 채식주의자를 읽게 된 것은 마침 인터넷서점에서 마일리지 소멸을 알리는 메일이 도착했기 때문이고 최근 딱히 흥미를 끄는 책이 없었기에 에라이 그럴 것이면 좀 유명한 걸 읽어보자 하는 기분이었다. 전자책으로 결제를 하고 한시간정도 걸려 다 읽었을 만큼 꽤 짧은 소설이었고, 중간에 내팽겨치지 않고 끝까지 읽을만큼 꽤 흡입력이 있었다.

 

  독자에게 등장인물의 내면을 얼마나 잘 보여주느냐가 좋은 작품의 기준이라고 한다면 채식주의자는 분명이 좋은 작품이다. 애초에 이런 문학작품을 읽고 작가가 창조한, 그러나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의 내면을 엿보기 좋아하는 사람의 취향을 그대로 파고든 작품이다. 특히 인간이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응어리 -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검질긴-그 응어리를 잘 묘사했다. 특히 1부에 자신의 응어리조차 관심이 없는, 전형적인 한국중년남성의 시선으로 아내의 응어리를 바라보는 서술은 일품이었다. 오히려 중후반부의 상세한 내면묘사가 거슬릴 정도로 1부의 묘사는 담백하고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했다.중후반부는 내면묘사가 너무 화려해서 아쉬운 맛이 들었다.


 작품 전체의 내용과 주제의식을 생각해 본다면, 제목은 채식주의자 보다는 [몽고반점]쪽이 좋지 않았을까? 작가가 제목을 고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미숙한 탓이겠지만,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성인들의 가면이 부서지고 자신의 검질긴 응어리에 짓눌리는 것을 보여주는 제목으로는 몽고반점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취향상, 어떤 이야기(物語)로써의 흥미는 떨어지기에 두 번 읽지는 않겠지만, 작가가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의 응어리를 보여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그 재미는 검질긴 류의 재미이다.

의천도룡기 결말이 바뀐 이유

문학 2016. 8. 21. 01:14 Posted by 闖

 영웅문 3부로 널리 알려진 의천도룡기의 원래 결말은 이렇다. 조민이 장무기에게 마지막 3번째 부탁으로 눈썹을 그려달라고 하고, 장무기가 웃으며 앞으로 평생 그려주겠다고 하는 순간 창문이 열리며 주지약이 등장해 "무기오빠, 나에게도 한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한 것을 잊지 않았지요?"라며 묘하게 웃자 장무기가 만감이 교차하며 붓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 결말은 조민과 장무기는 일생 함께할 것이지만 주지약 역시 함께일 가능성을 내포한 것으로, 작가도 후기에 장무기가 진정 사랑한 사람은 그 스스로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썼다.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결말인데, 2004년 개정판에서는 주지약이 한숨을 쉬며 두 사람이 아이를 가지는 것은 좋으나, 결혼만은 하지말라, 그리고 가끔 자신을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하고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김용 작품의 결말은 대체로 해피엔딩이고, 남녀간의 정은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김용의 작품에서 서로 사랑하지만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는 죽음이 갈라놓는 경우이거나(진가락-향향공주), 피치못할 사정으로 상대방을 떠나는 경우(장무기-소소)등 일부분에 불과하다. 김용은 필시 남녀간의 사랑이 백년해로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소의 경우에는 후기에 "사랑하는 소소와 이어주지 못한 것이 마음이 아프다"라고 썼을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주지약과 장무기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며, 조민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이어주지는 못하겠지만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 여지를 남겨두는 결말을 택한 것이 김용다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김용은 왜 결말을 바꾸었을까? 


 나는 김용의 사랑관념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이에 백년해로 하는 것 이상 좋은 것이 어디 있겠냐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것이다. 주지약의 사랑이 구판에서는 장무기와 해로할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이었다면, 개정판에서는 단념하는 대신 장무기의 결혼식을 자신만의 것으로 남겨두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장무기의 결혼식은 일생에 단 한번 주지약과 치루다만 수라장의 기억이 될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없으니 단 하나의 추억이라도 소중히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도 사랑의 한 형태이니,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이어진 셈이다. 


 김용도 나이들어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한 것이 아닐까? 경험은 사람을 변화시키니 말이다. 문득 주지약의 마지막 한숨이 가슴에 저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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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소봉의 자결에 관하여

문학 2016. 4. 7. 15:55 Posted by 闖

 김용소설 중 3대걸작으로 꼽히는 것은 "녹정기", "천룡팔부", "소오강호"이다. 이 중 천룡팔부는 의형제인 3명의 남자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데, 막내는 대리국의 왕자이자 가는 곳 마다 미인과 사랑에 빠지는 단예 단공자이고, 둘째는 소림사의 말단승려에서 신비문파의 장문인 겸 부마전하가 되는 허죽 소화상이며, 첫째는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고수이자 개방의 방주였으며 대요나라의 남원대왕인 소봉이다.

 

 3명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가장 독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영웅호걸의 가슴아픈 일대기인 소봉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비극적인 소설의 결말이 그러하듯, 천룡팔부 역시 소봉의 자결로 끝이난다. 독자들은 절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가슴을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라, 천하무적의 무공을 가지고 있으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인 요나라 남원대왕에 봉해졌고, 호탕하고 의리가 있으며 누구에게나 좋은 술친구인 젊은 사나이가 어찌할 수 없는 오해를 풀기 위해 결국 자결로 자신의 진정을 내보이는 장면을 말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소설을 쓰는 신필 김용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소봉의 자결은 나름대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처음 읽을 당시에 나는 젊고 패기에 가득한 소년이었기에, 그저 의형제에 대한 의리와 나라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소봉이 죽으면서 일갈한 "요나라사람이 요나라황제를 협박했으니 향후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겠느냐"는 말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 어느정도 인정에 대해 이해를 한 지금 돌이켜 보면, 소봉의 자결은 그 이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소봉의 인생은 기구하기 이를데 없다. 부모의 원수인지도 모르고 사부로 모시고 무술을 익혔고, 양부모를 친부모로 알고 자랐다. 자신이 속한 핏줄인 거란족을 죽이는데 앞장서는 한족단체의 수장이 되었으며, 나중에 사실을 알고는 또 한족과 원수가 되었다.죽은 줄 알았던 친부가 양부모와 사부를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술과 친구를 사랑하였으나 취현장의 일전에서 술에 취해 천하영웅들과 친구들에게 공격을 받아 수많은 친구를 죽였고, 친부모의 원수를 갚으려다 사랑하는 아내를 오해하여 때려죽이게 되었다. 비록 일신에 천하무적의 무공을 가졌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단 말인가!

 

 소봉의 인생을 찬찬히 다시 짚어보도록 하자. 개방방주 교봉으로 통하던 시절의 그는 민족주의, 중화주의적 가치관을 주입 받고 자랐다. 거란족인 그를 한족으로 키운 사부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치관은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붕괴하게 된다. 이에 실의에 빠진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아주가 한족이든 거란족이든 상관없으며 소봉을 따라 거란족이 되겠다는 사랑고백을 받았을 때 크게 기뻐하며 아주와 함께 소와 양을 키우며 일생을 보낼 결심을 한 순간 소봉의 상처는 치유되었고 모든 것이 행복하였다. 다만 한가지 부모의 원수는 갚지 않을 수 없는지라 그 일을 끝으로 만리장성 북쪽으로 떠나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약속한 것이다.

 

 행복한 순간은 잠깐이요, 불행은 긴 시간 영웅을 괴롭게 하는 법이다. 결국 속임수에 빠져 아주를 때려죽인 후 소봉은 이미 살아갈 의미를 잃었다. 아주의 묘를 파면서 그 옆에 자신이 누울 구덩이도 함께 판 것이다. 이 절망의 순간 다시 살아갈 의미를 준 것인 다름아닌 원수의 정체였다. 미약한 실마리였지만 원수를 찾을 희망을 얻은 데다가 무엇보다도 이 원수는 부모의 원수일 뿐 아니라 아주의 원한도 더해진 것이기에 그야말로 불구대천이요 혈해심구이다. 그러나 그 원수인 모용박이 아버지 소원산과 화해하면서 갚을 길이 없어져 버렸다. 이 때 소봉에게 남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남원대왕의 부귀영화? 처제 아자의 집착가득한 애정공세? 단예, 허죽 등 의형제와 친구들과의 의리? 이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미 함께 소와 양을 키우기로 한 그녀가 없는 것을!

 

 이제 소봉에게 남은 인생이란 장백산맥에 숨어살며 혼자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것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설령 그것이 소봉에게 있어 즐거운 시간이라고 해도, 진정 소봉이 원했던 것들은 무엇하나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민족의 영웅이 되고자 기개를 키웠던 것이 다 무슨 소용이며 서로 사랑하는 즐거움 역시 물거품이 된 이후 소봉은 죽을 자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를 찾을 때까지는 그저 독한 술을 마시며 조나라 영웅호걸의 슬픈 노래를 읊조릴 따름이다. 요나라황제의 오해는 그에게 있어 대단할 것이 없다. 소봉은 일생 오해를 받았으며 억울한 상황을 겪었다. 그런 영웅이 그만한 일로 마음이 약해져 죽을리는 없는 것이다. 다만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애처의 뒤를 따라간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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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3명은 서로를 잊지 못하는가

문학 2016. 4. 3. 11:30 Posted by 闖

  모든 것이 빨리빨리 변해가는 요즘 세상이다. 서로 없이 죽고 못살더라도 헤어지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 새 연인과 다정한 사진이 sns를 장식하는 것이 흔한 시대에 화이트앨범2의 3명은 왜 이렇게 서로를 놓지 못하고 질질 끄는 것일까? 3명이 서로를 잊지 못하는 이유가 작품 내에 직간접적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설정이고 바꿔 말하면 이 이유가 해결되면 새출발이 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다.

  세츠나는 보편적인 시각으로 보면 외관상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다. 주위 남성의 선망의 대상이며 숱한 구애를 받는데 자신을 배신한 하루키를 잊지 못한다. 작가는 이 이유를 청소년기의 트라우마를 제시하면서 설명한다. 중학시절 친구들에게 억울한 배신을 당한 기억 때문에 자신이 만든 3명의 세계를 부순 것이 자기자신이라는 죄책감과 섞여 하루키가 스스로 떠나기 전에는 자기가 먼저 배신할 수 없는 것이다. 하루키가 카즈사와 저지른 외도는 세츠나의 눈으로 볼 때 외도가 아니라 자기가 자초한 파탄이고 카즈사가 해외로 떠나므로써 무너진 애인이자 친우인 하루키를 배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세츠나가 이 트라우마에서 해방 되는 것은 세츠나트루와 같이 신뢰관계의 완전한 회복이 전제되어야 한다. 서브히로인 루트에서 세츠나가 물러나는 이유는 하루키가 확실한 배신을 해주었기 때문이고 -불사조는 설구워져서는 부활할 수 없다- 카즈사루트에서는 결국 잊지 못하고 3명의 관계회복을 시도하면서 끝이 난다.(세츠나에 있어서 카즈사에게 떠나는 하루키는 배신자 하루키가 아니란 점을 상기하자.)

  카즈사가 하루키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쉽게 눈치챌 수 있다. 하루키와 만나기 전까지 카즈사는 인생포기자였다. 인생의 설계자이자 이해자라고 생각했던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루키와 만남을 통해 카즈사는 다시 인생을 걸어갈 힘을 얻게 된다. 바로 하루키의 존재 그 자체이다. 카즈사의 인생은 하루키를 위해 살아가는 것으로 정해진 것이다. 피아노를 치는 것도 그 안에 있는 하루키를 꺼내기 위해서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하루키는 카즈사와의 관계를 어떤형태로든 완전히 끝장내려고 한 적은 없다. 세츠나트루에서조차 친우로서 관계는 부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루키가 카즈사를 버리지 않는 이상 카즈사 역시 하루키를 잊을 리 없다. 작가의 설정은 더욱 가혹해서 카즈사의 충견속성 때문에 버려지더라도 주인을 섬긴다고 한다.

  하루키의 경우는 돌보기 좋아하고 잘못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의 영향이다. 돌보기 좋아하기 때문에 다메온나(일상생활파탄녀)인 카즈사를 버릴 수 없고, 잘못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츠나를 배신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서브히로인 결말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이 돌보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서브히로인의 곁으로 떠난다. 즉, 돌봄의 대상이 카즈사에서 서브히로인으로 이동한 것이다. 서브히로인들은 각각 유능한 인재로 묘사되지만 정작 하루키가 매력을 느끼는 부분은 자신이 참견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은 부분이다.

  이상을 놓고 보면 일생 서로를 잊지 못하는 사람은 카즈사가 확실하다. 세츠나도 모든 관계에 무덤덤해지는 노년기가 오기 전에는 계속 괴로움을 품을 것이다. 하루키는 새로운 돌봄대상이 출현하면 카즈사를 떨치고 살아갈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클로징챕터와 같이 세츠나에 의한 동요가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생 카즈사를 품고 세츠나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대학시절의 하루키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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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앨범2 결말

문학 2015. 7. 17. 18:55 Posted by 闖

 화이트앨범2의 최종결말은 키타하라 하루키가 결국 토우마 카즈사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본다. 키타하라 하루키, 오기소 세츠나, 토우마 카즈사라는 3명의 인간을 관찰해서 내린 결론이다.

 

  세츠나의 성장환경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중산층 가정이다. 크게 부유하지는 않아도 경제적인 곤란은 없는, 엄부자모, 현모양처, 그런 부모의 품에서 자라난 약간 응석꾸러기지만 착실한 남매. 특히 가족간의 관계가 대단히 친밀하게 묘사되고 있다. 특히 가족개개인의 의사결정에서 가족간의 커뮤니케이션이 대단히 큰 역할을 한다. 이것은 엄한 아버지지만 독단적인 의사결정보다 가족회의라는 장치를 통해서 결국 아내와 자식들의 의견을 따라주어 권위와 화목을 동시에 지킨 아버지의 공이 크다. 무엇보다도 이 가정에는 폭력이 없다, 물리적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이렇게 좋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가족의 소중함을 안다.

 

 카즈사의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 비록 어머니 뿐인 가정이었지만 충분 이상의 애정을 받고 자란 것으로 묘사된다. "카즈사를 딸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전세계에 있는"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사춘기 무렵 카즈사의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 요코가 카즈사를 두고 해외로 떠난다. 실제 이런 경우가 있을까 싶지만, 작중 묘사된 요코의 성격을 볼때 충분히 가능하다. 요코는 어머니로써 자식에게 애정은 충분했지만 어떻게 전달할지는 잘 모르는 사람이다. 카즈사를 두고 떠난 것 자체가 카즈사의 성장을 위한 요코의 결정이었지만, 그것이 피아니스트 카즈사를 생각한 결정이었지 요코의 딸 카즈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카즈사는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 자체를 거부하게 된다.

 

하루키의 성장환경에 대한 작가의 의도는 세츠나, 카즈사를 절반쯤 이해할 수 있는 가정이었다. 초6까지는 화목한 가정, 이후로는 가정불화와 이혼으로 파탄. 그러나 작가가 의도한 것 보다 이후 전개에서 더 나빠진다. 모친과의 관계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바로 독립해 인연을 거의 끊을 만큼 나빠진 것이다. 이는 하루키가 연애문제로 침울해진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이 가족구성원 간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작중묘사를 보면 부모중 어느 한쪽이 특별히 잘못했다기 보다는 이런저런 갈등끝에 결국 붕괴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런 환경에서  자라게 되면 엇나가서 방황하게 되거나, 좀 조숙한 대신 마음의 벽을 가진 자기완벽주의자가 되는데 하루키는 후자에 가깝다.

 덕분에 일정수준의 인간관계를 만들 순 있지만, 세츠나처럼 행복한 가정에 융화될만한 인간이 되기는 힘들다. 하루키가 세츠나의 가족을 동경하지만 거기에 진작부터 자연스레 섞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가족간의 애정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뿐이라면 다행이겠지만 행복한 가정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오기소가에 파혼을 선언하고 세츠나의 동생에게 얻어 맞을 때, 하루키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카즈사가 하루키에게 마음을 연 것은 끊임없는 하루키와의 접촉도 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그 끊임없는 접촉에도 카즈사의 역린은 전혀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모르는 인간 사이의 접촉은 상대가 어느정도 평균적인 반응 패턴을 보이리라 가정하고 대화를 시작한다. 날씨나 식사, 가족의 안부 등등...그러나 하루키는 그런 주제를 선택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사무적인 화제로 접근한다. 왜냐하면 하루키도 카즈사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세츠나가 하루키에게 자기소개를 하면서 가족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만약 보컬요청이라는 필요가 없는 일반적인 첫만남이었다면 하루키는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떠났을 것이다. 세츠나가 카즈사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하루키라는 공통의 관심이 없었다면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계속 설탕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둥 식단의 영양이 어쩌고 했다면 카즈사가 배길 수가 없다.

 

 세츠나 : 모두가 행복하지 않으면 싫어! 모두가 우리를 축복해주지 않으면, 싫어...

 이렇게 형성된 하루키, 카즈사, 세츠나의 인격을 생각하면, 각자는 서로 친구까지는 될 수 있다. 그러나 평생 함께하는 가족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세츠나 한 사람 뿐이다. 한 사람으로는 가족이 성립할 수 없다. 하루키와 세츠나가 결혼해서 아이가 생긴다해도, 하루키는 좋은 아버지가 될 순 없다. 이 가족이 행복하려면 오기소 부부가 조부모로서 함께 생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하루키는 어느정도 이상은 융화되지 못한다. 가족은 행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루키는 어딘가 겉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외도를 한다거나 일에 치중해 가정을 소홀히 한다거나 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세츠나가 바라는 완벽히 행복한 가정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세츠나는 상처받고 하루키가 다시 자책하는 패턴이 영원히 반복되게 된다.

 

카즈사 :딱 하나만은, 절대로 보증할 수 있는 미래가 있어. ...네가 죽으면, 난 곧바로 그 뒤를 따를거야.  

 그렇다면 하루키와 카즈사는 행복한 가족을 꾸릴 수 있을까? 이 둘은 상처입은 서로를 햝으며 애정을 지속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들은 행복한 일반가정이란 것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아이보다 서로를 더 중시하는 연인관계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하루키는 행복한 가정을 믿지 않고, 카즈사도 그에게 행복한 가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끊임없이 서로 사랑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족한다. 일반적인 가정은 아니지만, 어쨌든 둘만의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그다지 '행복한 가족'은 아닐 수 있겠지만, 두 사람의 유닛은 분명 지속된다.

 

 작중 하루키의 행보를 보면 어떤 실패를 경험하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틀어밖혀 버린다. 그리고 쌓아올린 인간관계를 무너뜨리는 패턴을 보인다. 그나마 유지되는 것은 악우인 타케야 정도인데, 이거야 말로 해외도피를 즐기는 카즈사와 같은 패턴이다. 단 둘 뿐인 세계라도 충분한 하루키-카즈사와 결코 외부의 빛을 포기할 수 없는 세츠나, 이것은 결정적인 요소이다.

 

 

하루키 : 부모님 쪽은 근처에 살고있습니다만, 뭐, 학비를 내주는 것 이외에는...

  유유상종이라, 결국 시간이 흐르면 하루키와 카즈사는 서로 끌어당기게 된다. 하루키가 아무리 행복한 오기소가를 동경하더라도, 그 호기심은 오래가지 않는다. 일단 한 번 손에 넣으면 더 이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본질적인 차이를 '틀림'으로 인식하고 내팽게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화이트앨범2의 마지막은 어떤 형태로는 하루키와 카즈사의 결합이 될 것이다.

 

인물대사 출처 : http://blog.naver.com/voz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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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다른 사람의 리뷰를 종합한 결과,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을 덧붙인다.(`15.10.29)

 

먼저, 서브히로인 3명은 IC의 3명을 투영한 것

치아키 - 오기소의 제멋대로인 악녀적인 면과 내숭녀의 면모를 극대화 시킨 캐릭터

코하루 - 이름부터가 작은 하루키(小春).

마리 - 하루키가 IC의 이별에서 카즈사를 쫓아가는 스토리를 보여주는 카즈사형 캐릭터

 

코다의 결말 역시 3명 각각의 결말

세츠나트루(세츠나의 꿈) : 세츠나가 꿈꾸는 이상적인 결말. 3인의 세계가 세츠나를 중심으로 재결성

우와키(카즈사의 현실) : 카즈사가 이끌어가는 결말. 하루키를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지만...

카즈사트루(하루키의 선택) : 하루키가 선택한 결말.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 지키기로 결정

 

 세츠나트루는 역시 세츠나의 꿈에서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결말, 욕망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본질적 색정광인 카즈사의 우와키가 현실적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의 완결, 대단원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결국 두 사람 중에 누군가를 하루키가 선택해야 끝이난다. 그렇다면 하루키가 선택하는 결말은...

 

 

 

 

치정물로는 인생 No. 1

순애물로는 트라우마가 된 신조협려를 넘지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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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난한 사람들

문학 2014. 3. 4. 14:05 Posted by 闖

 

 ...가난한 사람들은 까다로워요. 가난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과 다른 눈으로 세상을 쳐다보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쳐다봅니다. 주변을 항상 잔뜩 주눅이 든 눈으로 살피면서 주위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씁니다.

 누가 자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다른 사람들이 <뭐 저렇게 꼴사나운 놈이 다 있어!>. <대체 저렇게 가난한 사람은 무슨 느낌을 갖고 살까?>, 아니면 <이쪽에서 보면 어떤 꼴을 하고 있고 저쪽에서 보면 또 어떤 꼴일까?> 등등의 말을 할까 봐 남의 말에 일일이 신경을 씁니다.

 바렌까, 모두 알고 있듯이 가난한 사람들은 발닦개만도 못한 인생이고 아무도 그들을 존중해 주지 않습니다. 누가 책에 뭐라고 쓰든 엉터리 3류 작가 족속들이 뭐라고 끼적이든 가난한 사람의 인생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왜 이전하고 같을 수 밖에 없느냐고요? 3류 작가들의 말대로라면, 가난한 사람이 가진 것은 모두 옷을 뒤집어 보이듯 세상에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죠. 그들 말대로라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성스러운 것도 있어서는 안 되고 자존심이니 뭐니 하는 것도 절대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얼마 전 예멜랴가 그러더군요. 사람들이 그를 무슨 자선 단체엔가 등록을 시켰는데 거기서 나오는 돈 한 푼 한 푼에 대해서 에멜랴가 어떻게 쓰는지 공식적인 검열 같은 것을 하더래요. 그들은 자기가 돈을 거저 주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을 구경한 대가를 치른 것 뿐이에요. 요즘은 선행이라는 것도 이상한 방식으로 행해지고 있더군요...... 어쩌면 항상 그래 왔던 건지도 모르고,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그들은 아예 선행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굉장한 전문가들이겠죠. 둘 중의 하나 아니겠어요. 당신은 아마 이런 것까지는 몰랐을 거에요. 이제 아셨죠, 세상은 그런 겁니다!

  저희 가난한 사람들은 다른 일은 몰라도 이런 일이라면 훤하죠! 가난한 사람들은 왜 이런 것을 다 알고 항상 이런 생각만 하고 있냐고요?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레스토랑을 향하던 신사가 가난한 사람의 옆을 스쳐 가면서 속으로 하는 말을 가난한 사람은 다 듣는 거에요. 신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거지놈이 오늘은 무엇을 먹으려냐? 나는 소떼 빠삘요뜨를 먹을 거지만 이자는 기름기 하나 없는 죽이나 들이키겠지?> 그가 기름기 하나 없는 죽을 들이키든 말든 대체 자기하고 무슨 상관이랍니까? 하지만 이런 자들이 정말 있어요...(중략)...

 가난한 사람에게 비어져 나온 발가락과 다 해진 팔꿈치는, 예를 들자면 당신에게 처녀성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커다란 부끄러움이란 말이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당신이 - 제 무례한 표현을 용서하십시오- 옷을 벗으려 들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은 누가 자기의 누추한 집을 들여다보거나 가족관계가 밝혀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 거라고요!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1846, "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석영중 옮김) 129~131pp.

 

복지제도에 종종 포함되는 것 중에 재력조사(means test)라는 것이 있다. 돈은 얼마나 버는지, 집은 얼마짜리고 자동차배기량이 어떤지 등등을 따져서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특히 이 재력조사는 현금성 혜택에 민감하게 적용한다.

요컨대 당신이 가난하다는 것이 증명되면 복지혜택을 주겠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이번 송파구 3모녀 자살사건이 바로 이런 선별적 복지제도로 인한 사각지대라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모녀가 왜 복지제도의 문을 두드릴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정말 가난한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요컨대 저 책에 나오는 19세기의 러시아나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이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시선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글을 보는 당신은? 별반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을리가 있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복지는 자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누가 그들의 권리라고 생각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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