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기사를 읽다가, 역사를 가지고 곡학아세하는 글이 있기에 이 글을 쓴다. 무슨 글인고 하니, [산업혁명 500년 전, 영국보다 잘 살았던 송나라는 왜 망했나]하는 글인데, 송나라 사례를 들어서 문재인정부를 은근히 공격하고 있다. "문재인, 이념을 쫓는 좌파 니들이 바로 지금의 도학정치가 들이다. 니들 때문에 경제가 망한다" 이게 바로 유성운씨가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도학 정치가들의 발목 잡기 산업혁명 목전에서 내리막https://news.v.daum.net/v/20190103000502617 |
진짜 송나라가 도학정치 때문에 산업혁명을 못하고 망했을까? 아니, 송나라가 도학정치를 한 건 정말일까? 정말 그렇다면, 도학정치를 한 도학정치를 한 송나라는 왜 중국 역사상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
송나라, 이 기사에 언급된 산업혁명 직전의 송나라는 북송일 것이다. 북송이 망한 원인은 물론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렇다 할 결정적인 원인은 없다. 딱히 망해야 해서 망한 나라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완전히 망하지 않고 남송을 이어갈 수 있었다. 북송이 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금나라와의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도학정치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도의를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금나라태조는 맹약에 충실했지만 송은 도의를 무시했다. 휘종처럼 정치에 관심이 없는 예술가 황제 밑에 채경과 동관 같은 신념이 부족한 인물이 정권을 쥐었으니 당연했다...(중략)...금은 송의 배신행위에 분노했다...(중략)...금군은 마침내 개봉성을 함락했다.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살림출판사> |
도학정치의 송나라. 도학이라는 말이 주는 몽상가적 늬앙스를 빼고나면, 이것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확실히 송나라는 사대부를 우대했다. 사대부의 목표인 관료의 수와 봉급은 송나라 때가 가장 많았다. 이전 시대의 당나라와 오대는 군인들이 설쳐서 망했기 때문에, 반대로 문(文)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렇게 사대부를 키운 송나라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도학정치 때문에 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북송과 같이 사대부를 우대한 남송은 몽골(원)에 의해 망했는데, 결코 허무하게 망하지 않았다. 당시 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몽골의 주력군을 상대로 칸을 전사시키는 등, 수십년을 끈질기게 버틴 끝에, 애산전투를 끝으로 그야말로 사대부의 나라답게 장렬하게 망했다. 당시 몽골군의 전설적인 전투력을 감안하면, 이거야 말로 사대부를 키운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도학정치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천상의 죽음과 전겸익의 투항을 돌아보면, 사대부를 우대한 송나라와 똥파리 취급한 명나라의 마지막 사대부가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도학정치 때문에 송이 망했다는 이야기에 대한 반박은 이쯤해두고, 이번에는 도학 때문에 민생이 파탄났다는 주장을 보자. 은근슬쩍 산업혁명 운운하면서 마치 도학 때문인 것 경제가 파탄 난 것 같은 늬앙스를 흘리고 있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문재인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쓴 것이다. 아주 악날한 붓끝이다.
북송의 경제는 융성하기 그지 없어서, 수도였던 개봉성은 불야성이었다. 대도시가 불야성 수준이 되려면 귀족들만 불을 켠다고 될 일이 아니어서, 서민층의 활력이 넘치는 시대였다. 사대부만의 나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산업혁명에 이르지 못한 것은 아직 인류가 그 단계에 도달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12세기 북송 VS 18세기 산업혁명)였기 때문이지 딱히 상업의 자유가 없거나 사법이 불공평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조건이 갖춰 진다고 반드시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진화는 다양한 요인의 결합과 우연의 산물이다. 또 산업혁명 시기의 영국도 딱히 사법제도가 공정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지금도 사법제도가 유전무죄 무전유죄인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덧붙여, 수호전의 배경이 북송이었던 것은, 남송을 멸망시킨 원나라에서 의도적으로 사대부를 탄압했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정치보다는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사대부는 관리가 되어야 하는데, 몽골왕조에서 한족관료가 고위관료가 되기는 어려웠다.) 소설을 쓰자니 자연히 원나라를 배경으로 하면 목이 잘릴 것이고, 그 이전 시대인 송나라를 배경으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 특별히 송나라 때 민중들이 더 살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어처구니 없는 것은, 중국이 이후 성장하지 못하고 침체한 것을 모두 송나라 도학의 후유증으로 돌리고 있는데, 심해도 너무 심했다. 역시 이명박근혜 10년동안 이게 다 노무현때문이다를 외치던 보수의 전매특허라고 해야할까? 여기서 중국의 성쇠를 다 논할 수는 없고, 북송의 경제침체에 대해서만 간단히 보자.
북송의 경제가 융성했지만, 재정지출 역시 막심해서 결국 개혁을 해야할 시기가 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신법, 왕안석의 개혁시도였다. 이 개혁시도가 실패한 것은 딱히 개혁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신법을 시행했다가 철폐했다가 다시 시행했다가 하는 등, 오락가락 했기 때문이다. 정책의 일관성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송나라 역사가 정부와 여당에 주는 진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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