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양의무자 기준이란 복지수급자의 직계혈족(1촌) 및 그 배우자가 부양능력이 있다고 판정되면 복지급여나 서비스를 주지않는 기준을 말한다. 즉, 가족 중에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용돈도 주고 외식도 시켜주고 드라이브도 시켜주고 등등 가족 내에서 해결하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를 살펴보려면 먼저 한국 복지제도는 누구를 대상으로 시행되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웬 뚱딴지 같은 소린가 생각이 들겠지만, 내 말을 한번 들어보시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양의무자 기준은 박물관에서 먼지와 곰팡이를 벗삼아 처박혀야할 구시대의 유물이다. 아니?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 가장이 가족을 먹여살리는, 자기가족은 자기가 책임지는 부양의무자 기준이 구시대의 유물이라니, 이런 불효막심한 주장을 하는 놈은 누구인가. 흥분하지말고 따져보자.


부양의무자 기준은 연좌제와 같은 철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최소단위가 가족이라면, 사회적책임의 최소단위도 가족이 된다. 이것은 근대이전의 사고방식으로, 가족 뿐 아니라 가문전체가 영욕을 함께 누렸다. 그래서 한 사람이 출세하면 가문전체가 일어서고,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가문전체가 책임을 졌다. (一人得道 鷄犬昇天 : 한사람이 신선이 되면, 그의 닭과 개도 하늘로 오른다.)지금도 부족단위로 생활하는 일부 사회에서는, 누가 유명한 축구선수가 되면 부족전체가 입을 벌리고 돈을 요구하는데 마치 내 돈 내놓으라는 식이다. 


한국의 전통 역시, 개인보다는 가족, 그것도 대가족을 기준으로 하는 사고방식이 수천년을 내려왔다. 그 유풍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고,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그러나 1인가구비중이 빠르게 증가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이제 사회의 최소단위는 가족이 아니라 개인이다. 이는 앞으로 더 빨라지면 빨라졌지 느려지지는 않을 현상이며, 사회제도를 이에 맞춰 개혁해야한다. "개인적 일탈"을 강조하는 세상이 아닌가?


자, 서설이 길었다. 성급한 독자라면 부양의무자 기준 같은 건 진작에 화형시켜버렸어야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느긋한 독자를 위해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 복지제도는 행복한 가족을 기준으로 만들었다. 남편은 열심히 돈을 벌어오고(breadwinner), 아내는 현모양처로 가사를 담당하면서 이들은 노부모에 효도하고 자식을 키운다. 그러나 공업화, 도시화로 핵가족화가 진행되더니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핵가족마저 붕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복지제도는 대부분 외환위기의 응급처방형태로 도입된 것이 많고, 기존제도를  보충하는 형태로 복지제도개혁이 이뤄졌기에 외환위기 당시에도 이미 뒤떨어진 가족모델을 기준으로 설계되었다. 지금 당신이나 주변사람의 가족형태를 살펴보라. 붕괴한 가족과 고립된 개인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런 상상속의 가족모델은 폐기하고, 개인을 기준으로 복지제도를 재설계해야한다. 이미 경제제도는 개인기준으로 바뀐 것이 많다. 2002년에 자산소득 부부합산세는 위헌이라고 전원일치판결하지 않았는가? 이미 돈 좀 버는 양반들은 자기 주머니 따로 차고 산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시대의 흐름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과세가 개인기준이면 복지도 개인기준으로 받아야한다.


문제는 가족이 책임지지 않으면 사회가 책임져야하고, 자연히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양의무자 기준의 가장 강력한 옹호논리다. 보수파는 여기서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에 돌입한다. 그러나 이 농성군에 지원군이 올 가능성은 없다. 고립무원으로 언젠가는 함락되어 바뀌게 된다. 그래도 버틸 때까지 버텨보자는 속셈이다. 그 동안 복지사각지대의 송파 세모녀는 자살 말고는 방법이 없다. 


재원문제는 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낸 세금이 투명하게 운용되고 자기에게 돌아온다면 더 부담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다. 증세논의는 이 글의 핵심이 아니므로 합의 가능하다 정도로 넘어가고, 다시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돌아가자.


그 다음의 옹호논리로는 복지제도가 발달한 유럽 등 다른 나라에서도 부양의무자 비슷한 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개인주의가 뿌리깊고 공업화도 수세기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그럼에도 남유럽은 가족주의 복지국가이고, 독일도 조합주의나 가부장주의적인 복지국가로 분류된다. 실제 개인주의, 여성주의적인 복지국가는 북유럽에 불과하다. 그러니 한국같은 복지후진국에서 부양의무자 기준이 공격을 받으면서도 아두를 안고 있는 조자룡마냥 건재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광범위한 부양의무자 기준은 남유럽을 제외하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남유럽은 사실 제대로 된 복지제도가 없는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게 없다.)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이런 옹호논리로 덮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크다. 복지 사각지대의 대부분은 이 부양의무자 때문에 발생하며, 소개할 필요도 없을 만큼 많은 사례가 있다. 대표적으로 연락도 안되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부양의무자, 부양능력이 안되는데 부양의무 때문에 자신도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부양의무자 등이 문제다. 후자의 경우에는 결국 빈곤의 멍에를 씌워서 삶의 의욕을 저하시키기에 더 큰 문제다. 조선시대 삼정문란으로 백골징포, 황구첨정, 족징, 인징이 횡행하자 백성이 도탄에 빠졌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부양의무자 기준이 지속되면 결과도 마찬가지로 좋지 않을 것이다.


부양의무자를 없애고 개인기준으로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제도가 시대를 쫓아가지 못하면 제 기능을 못하기 마련이다. 이미 한국사회는 개인의 모임이지 가문이나 가족의 모임이 아니다. 학연, 지연, 혈연의 끈끈함 역시 이제 미덕이라기 보다는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다. 보수파들이 그토록 소리높여 주장하는 자립, 자활, 자조를 위해서라도 부양의무자의 고리를 끊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