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세계의 특징 중 하나는 철학적인 면모이다. 요즘으로 치면 라이트노벨 수준의 독자층을 가진 문학치고는 꽤 이례적이다. 이는 무협세계관에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도교와 불교의 영향이 가장 크다.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종교철학의 영향이 그저 들은 풍월이라고는 해도 무협세계에 녹아들어간 것이다.
무협소설의 대가인 김용의 작품에서 고수의 경지에 오르면 등봉조극(登峰造極)이라고 하는데, 이는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상태이다. 이 경지가 보통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경지인데, 산꼭대기보다 더 높게 올라가려면 하늘로 올라가는 경지인 우화등선(羽化登仙)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은 열반,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더 올라갈 수 없다면 반대로 내려가는 것이다. 고수가 마치 무술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고 전혀 고수의 기세가 풍기지 않는 경지로 들어가면 무공의 경지는 진일보한다. 이것이 반박귀진(返樸歸眞), 가공품이 원목으로 돌아가듯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반박귀진의 고수와 평범한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다른 것은 이미 한 번 지나 온 길로 돌아왔기에 얻은 깨달음이다. 이것이 인생의 진리를 말해준다. 젊어서 좌충우돌 지나온 시기를 나이 들어 되돌아 보고 문득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무협세계의 고수가 아니기에 깨달음을 얻어도 반로환동(返老換童)하지는 못하지만, 반박귀진의 경지에 들면 인생을 또 새로운 맛이 가득해진다.
시인 류시화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 읊조렸고, 가수 이적은 '그 땐 미처 알지 못했지'라고 노래했다. 시와 노래에 담긴 감정을 음미하며 이해한다면, 이미 당신도 반박귀진의 고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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