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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발을 묶어놓은 꿩

철학/단상 2011. 8. 2. 18:25 Posted by 闖
 경전 가운데 미묘한 말과 논리를 가끔씩 한번 말해줘 그들에게 향학(向學)을 권하려 하면, 그 모습은 마치 발을 묶어놓은 꿩과 같습니다. 쪼아 먹으라고 권해도 쪼지 않고 머리를 눌러 억지로 곡식 낟알에 대주어서 부리와 낟알이 서로 닿게 해주는데도 끝내 쪼아 먹지 못하는 자들이니, 아아, 이들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형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비유가 재미있어서 옮겨보았다.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데 분명 공부는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곡식이다. 그러나 열심히 배우기는 커녕 어떻게든 시간을 때우려고만 하니, 예나 지금이나 열심히 공부하는 이는 드문 모양이다. 다만 꿩은 곡식을 주면 본능적으로 쪼아 먹기 마련이니 이 비유는 단지 그 형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지 실제 그런 일을 보았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긴 나도 실제 꿩을 키워본 적은 없으니 장담할 수는 없다. 사람이 공부를 하기 싫어해서 꿩만도 못하다면 그 또한 부끄럽지 않겠는가.

사족 : 정약용의 글에 보면 아들들도 공부를 등한시한다고 질책하는 글이 종종 있다. 이걸 보면 정약용도 애들 잡아서 공부시키는데는 별로 능숙하지 못했던 것 같다.

[편지]독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철학/단상 2011. 7. 26. 16:24 Posted by 闖
내가 몇년 전부터 독서에 대해서 자못 깨달았는데, 헛되이 그냥 읽기만 하는 것은 하루에 백번 천번을 읽어도 읽지 않은 것이다. 무릇 독서할 때 늘 도중에 한 글자라도 의미를 모르는 곳을 만나면 널리 살피고 연구해서 근본을 깨달아 글 전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매일 이렇게 책을 읽으면, 한권을 읽더라도 수백권을 아울러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읽어야 읽은 책의 의미와 이치를 명확히 알 수 있다.
 만약 사기자객열전을 읽을 때 기조취도(旣祖就道 : 조를 마치고 길에 올랐다)라는 한 구절을 보고 "祖가 뭡니까?"하고 물으면, 선생님은 "전별할 때 지내는 제사다."라고 하실 것이다. "하필 할아버지 조를 쓰는 이유는 뭔가요?"라고 여쭈면, 잘 모르겠다고 하시겠지. 그 후 사전을 가지고 祖의 원래 의미를 살펴보고 다른 책의 풀이와 해석을 살펴, 뿌리를 캐고 지엽을 모은다. 또 통전, 통지, 통고 등의 책에서 조제(祖祭)를 지내는 예법을 찾아보고, 한데 모아 차례를 매겨 책을 만든다면 길이 남는 책이 될 것이다. 이렇게만 한다면 전에는 하나도 모르는 네가 이날부터는 조제의 내력을 훤히 꿰는 사람이되어, 비록 이름난 학자라도 조제에 대해서는 너와 다투지 못할 것이다. 이 어찌 큰 즐거움이 없겠느냐. 주자의 격물공부는 이와 같이 한 것 뿐이다. 오늘 한가지 물건에 대해서 이치를 캐고 내일 또 한가지 물건에 대해서 이치를 캐는 사람들 또한 이렇게 착수를 했다. 격(格)이라는 뜻은 가장 밑까지 완전히 다 알아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가장 밑에까지 알아내지 못한다면 또한 아무런 보탬이 없는 것이다....(중략)....
 초서(鈔書 : 일종의 스크랩)하는 방법은 반드시 먼저 자기의 뜻을 정해 만들 책의 규모와 편목을 세운 뒤에 그 책에서 간추려내야 한다. 만일 그 규모와 목차 외에도 꼭 뽑아야 할 것이 있을 때는 별도로 한 책을 만들어 좋은 것을 깨달을 때마다 기록해 넣어야만 도움을 받을 곳이 있게 된다. 고기 그물을 쳐 놓으면 기러기란 놈도 걸리기 마련인데 어찌 버리겠느냐 
<정약용,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 예전에 동아대 홍성민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멋진 외모를 가진 분으로 늘 산만하던 강의실을 단번에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홍성민 교수도 한가지 주제에 천착(穿鑿)하는 것이 공부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분은 권력이라는 단어 하나만 가지고 공부한다고 했다. 권력에 대해 논할 때는 그 분을 제외하고는 말이 안 될 것이다. 아아, 나는 이리저리 기웃거리기만 하고 깊은 공부를 못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 염려스럽다.

2. 선생님의 중요한 일과도 늘 신문스크랩이었다. 나는 옆에서 늘 보면서 아, 천재학자는 우연이 아니고 저런 습관의 도움이 있었구나 하고 느꼈다. 그러나 내 본성이 게으르고 세밀하지 못해 하루하루 미루기만 했으니 역시  불초제자라 할 만하다. 정약용의 글을 보고는 선생님의 방법과 꼭 같다는 것을 알고 뛰어난 두 학자도 저렇게 하는데 나도 꼭 따라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이 블로그에 글을 써두게 되었다. 그동안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했으니 영험없는 귀신하고 다를게 없었다. 순자도 말하기를 적미(積微), 즉 조금씩이라도 매일 쌓아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하루하루 쌓아가면 언젠가는 이루지 않겠는가.
 


(전략)...시경 이후의 시는 마땅히 두보의 시를 스승으로 삼는다. 대개 온갖 시인의 시 중 두보의 시가 왕좌를 차지하게 된 것은 시경에 있는 시300편의 의미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시경의 시는 충신,효자,열녀,어진 벗(良友)들의 슬프고 아픈 마음과 충실하고 순박함이 나타난 것이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런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될 수 없는 것이며, 찬미하고 풍자하여(美刺) 권선징악하는 뜻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 따라서 뜻이 세워지지 않고, 학문이 부족하고, 삶의 큰 도리를 아직 배우지 못하며, 임금을 도와 백성에게 혜택을 주려는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은 시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중략)...그러나 시에 역사를 전혀 인용하지 않고 음풍영월이나 하고 장기나 두고 술먹는 이야기를 주제로 시를 짓는다면, 이거야말로 시골의 서너 집 모여 사는 촌구석 선비의 시인 것이다. 이후로 시를 지을 때는 반드시 역사를 인용하는 일에 주안점을 두거라.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를 인용한답시고 걸핏하면 중국의 사실이나 인용하고 있으니, 이건 또 볼품없는 일이다. 부디 삼국사기, 고려사, 국조보감, 신증동국여지승람, 징비록, 연려실기술 및 우리나라의 다른 글에서 사실을 모으고 고찰하여 시에 인용하면 그제야 후세에 전할 좋은 시가 나올 것이다....(후략)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 종종 순수예술의 가치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때마다 나는" 그래,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지 않겠어."하고 넘어가는 편이지만 속마음은 사실 정약용과 같다. 현실과 동떨어진 예술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다만 부잣집 재산을 관리하는 화폐노릇에 그칠 뿐이다. 이게 어찌 예술이라 하겠는가? 다만 술(術)의 가치는 있는 것으로 그저 한 번의 눈요깃감에 불과한 것이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이게 바로 "그건 그것대로"의 의미이다. 이태백이 시선이라 불리며 많은 시를 지었지만 그는 두보만 못하다. 선(仙)자를 붙인 것은 아주 적절하다. 현실에서 도피해서 신선놀음이나 하며 술이나 통쾌하게 마실 땐 좋겠다만 어찌 옳다고 할 수 있으리. 
 나 역시도 예전에 글을 짓는답시고 단어를 고르며 아름답게 꾸미려 한 적이 있었다. 그 때에는 세상보는 눈조차 뜨지 못했으니 몸은 어른이되 식견은 어린아이와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등줄기가 서늘할 뿐이다.

2. 전에 역사학자 이이화선생의 강연에서도 같은 말을 들었다. 중국역사에는 박식한 사람이 많으나 한국사를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나 역시도 중국의 각종 사서는 섭렵했으나 한국의 사서는 그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다. 게다가 주로 인용하는 고사성어도 사실 원유가 중국에서 왔으니 참으로 부끄럽다. 얼마전에 간신히 삼국사기와 고려사를 읽었는데 그 내용과 재미가 중국에 뒤지지 않았다. 다만 나라가 작으니 스케일이 좀 작을 뿐이다. 10만대군이 등장하기보다 수십, 수백, 수천 규모인데 아무래도 로망을 자극하기는 중국사에 좀 뒤지기는 한다. 그러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단순히 재미뿐 아니라 어제를 거울로 내일의 지표를 삼고자 하는 것인데, 한국의 역사를 모르고서 어찌 한국의 미래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정약용의 문제의식에 깊이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