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존슨이라는 심리학자가 쓴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라는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인간이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그림자(남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어두운 정체성, 예를 들면 폭력성향)를 다른 이에게 비추지 말라.
혹은 다른이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의 그림자를 비춰오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말고 평온하게 대하라.

아주 간단하게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상대가 나에게 화를 내더라도 반응하지 말고 그러려니 하라는 것이고,

남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면 혼자만의 장소에서 화를 내고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독교세계 사람이라 책 곳곳에서 기독교(신)를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동양의 도교철학이 떠올랐다.

 

도교철학의 정수는 노장사상인데,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장자의 포정해우(包丁解牛, 소의 몸을 따라 칼을 써서 자연스럽게 해체하는 최고의 기술)

이 주장과 로버트 존슨의 주장하는 자기 심리를 다루는 법은 일맥상통한다.

 

정신세계와 자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도교와 유사점이 있었다.

장자는 호접지몽을 말하며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라는 화두를 던지는데,

이 책에서도 나와 그림자를 시소의 양쪽에 비유하며 어느쪽도 버릴 수 없는 나라고 하는데,

이것은 나의 정체성이 표면에 드러난 것과 내면에 감춰진 것 둘 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름의 비평을 해보자면,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저자나 도교적 방법이 적절할 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꼭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경제학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인간사에서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TFT전략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TFT전략은 팃포탯(Tit for Tat)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1.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되,

2. 처음에는 선의를 가지고 대하고,

3. 상대가 악의를 버리고 선의로 다가오면, 다시 나도 선의를 베푼다.

는 것이다.

 

이 전략에 따른다면 상대가 화를 내면 나도 화를 내야 한다.

물론 처음부터 화를 내면 안되므로, 여전히 로버트 존슨의 심리전략은 일부 유용하다.

상대에게 선의를 가지려면, 내 악의를 남들이 없는 곳에서 해소하라고 해석할 수 있으니까

 

총평: 유익한 책이었는데, 어떻게 유익했는지는 심연에 넣어두고 잊어버렸다.

그 이유는 이책의 마무리가 추상적인데가 비유로 가득찬 설명이었던 탓이지 내 탓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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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보수화 원인

철학/단상 2023. 3. 12. 09:37 Posted by 闖

외환위기 이후 사회초년생들의 최대화두는 비정규직 문제였다.

뉴스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날이 드물 정도였고,

실제로 비정규직 일자리가 넘쳐났고, 정규직과 차이가 커 차별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가장 큰문제는 없다시피한 고용안정성과 정규직절반 수준의 임금수준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재인정부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했는데,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인천국제공항이 1호였다.

소위 인국공 사태에 대해 청년들은 환호하기는 커녕 실망을 드러냈는데,

여기서 20대 보수화가 출발했다고 본다.

 

보수언론은 공정하지 않다고 연일 나팔을 불었다.

어렵게 시험쳐서 들어가는 회사에 그냥 취직이 되다니! 이것이 공정인가?

그럴싸한 논리였고 이것은 그동안 비정규직 차별을 옹호하는 기득권의 주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정규직문제가 워낙 심각했기에 인국공 이전에는 가볍게 무시된 논리였다.

 

인천국제공항의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데는

자체 시험을 통해 최소한의 검증을 거쳤고(이 과정에서 일부는 일자리를 잃었다.)

인천공항공사와는 별개의 회사를 설립하여 정규직으로 채용했다.

이 과정에서 급여수준은 비정규직일 때 보다는 나아졌으나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고 정규직과는 여전히 큰 차이가 났다.

다만, 고용안정성 측면에서는 정년이 보장되므로 확실한 진전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고민 끝에 일정한 성과를 거둔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보수언론의 십자포화 끝에 문재인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은 어영부영 끝이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 비정규직 문제가 거론되는 일은 사라지고 말았다.

20대의 관심 역시 평등보다는 공정으로 넘어갔다.

 

이 차이가 지금의 20대 보수화를 이끌었다고 본다.

그들은 공정한 경쟁을 통해, 그 결과는 각자가 책임을 지는 것을 원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보수파의 논리이다.

애초에 공정한 경쟁이 있을 수 없으므로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 진보파의 논리다.

 

비정규직 문제가 화두였을 때는 불평등에 젊은 층이 분노했고,

인국공 이후에는 불공정에 젊은 층이 분노했다.

애초에 사회구조는 더 평등해지지도 않았고, 더 공정해지지도 않았다.

단지 관점이 바뀐 것이다.

나는 이것을 보수언론의 승리라고 본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봤는가다.

보수언론은 확실이 큰 이득을 봤다. (정권도 갈아치웠다.)

20대는 어떤 이득을 봤는가? 양질의 일자리는 늘어났는가?

사이비종교에 대하여

철학/단상 2023. 3. 6. 21:13 Posted by 闖

사이비 종교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종교라면 다 사이비다.

신이 존재한다는 전제부터가 글러먹었는데 나머지 교리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인간인데 신의 아들이니 뭐니 주장하는 종교는 특히 더 그렇다.

 

종교는 똑똑한 사람들이 멍청한 사람을 설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서 살아남은 것이다.

토론과 과학은 머리가 아프다.

가장 좋은 설득은 세뇌와 선동아니겠는가

 

제발 종교를 믿지 말라.

스스로 노예가 되서 맘이 편하다면 어쩌겠느냐만...

오로지 인생은 스스로에 달려있다.

 

 

1996년, 세계의 양심이라는 평을 받는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는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적합한 대중'에게 '가능한 범위내에서' 진실을 찾아내 알리는 것]

나름대로 먹물을 먹었다고 거들먹대던 대학시절에 촘스키의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린 기억이 난다.

 

2022년, 조국사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조국 전 장관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빈번하게 의도적으로 소환되며, 그 가족에 대한 사회적 폐족처분 역시 그렇다.

나는 먹물 좀 먹은 지식인으로서, 내 양심이 불러일으킨 책임감에 떠밀려 굳이 이 사태에 대해 정리하고자 한다. 

왜? 무엇때문에? 나는 법률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어떠한 영향력을 가진 명사도 아니기 때문에 내 머리통 속의 생각이 어떻든 아무도 관심이 없을 것이 분명함에도, 이 글을 쓰지않으면 견딜수 없는 양심통때문에! (분명히 수십년간 먹어온 먹물의 부작용이다.)

 

조국이 검찰을 건드렸다가 멸문지화를 입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진실이다.

그럼에도 대중은 검찰정권을 선택했고, 여전히 조국은 공격받고 있다.

대중이 진실을 몰라서 그런가? 아니다!

대중은 지식인이 알려주지 않더라도 스마트폰을 통해 각자의 진실에 도달하고 있으며, 도달위치도 지식인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대중은 조국이 억울하다는, 혹은 너무 심하게 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을 던지거나 그냥 지켜보았다.

대역죄인을 능지처참할 때 살점 한점 한점 저미는 것을 구경하는 태도였다.

그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외쳐도 망나니의 칼춤에 환호했다.

지식인들이 침묵했기 때문일까? 지식인의 책무를 방기했기 때문일까?

 

1996년에 촘스키가 지식인들의 책무를 말할 당시만해도, 지식인들은 믿고 있었다.

대중들이 진실을 알면 진실의 편에 설 것이라고, 진실이 승리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같이 분노해주리라 믿었다.

그렇기에 지식인들은 진실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것을 알릴 책무가 있었다.

그것은 지식인의 책무인 동시에 권리였다.

 

2022년, 이제 한국에서는 아무도 진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실체적 진실이라는 표현이 난무하더니, 모두들 넌덜머리가 난 모양이다.

그런 것에 좋아요와 구독, 알림신청을 누를 시간은 없는 것이다.

스팸신고 안하는 것만해도 많이 봐준 셈이다. 

 

모두의 진실 보다는 내 지갑이 중요한 시대

그럼에도 나는 1996년의 지식인의 책무를 2022년에 수행하지 않으면 양심이 찔려 죽을 것 같다.

진실을 소리쳐 외치지 않으면 나도 공범이 된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

 

조국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 그것은 대역죄이다.

나랏님에게 감히 칼을 겨누었으니 멸문지화를 입는 것이다.

나랏님이란 조국이 전공한 법, 그 법 위에 군림하는 엘리트들이다.

길 가는 사람들 모두 알고 있는 진실이다.

 

댓글공작원인 국정원 직원의 인터넷필명이 좌익효수였다.

그들의 뜻대로 조국은 효수되었다.

이래도 또 나서겠느냐고 지식인들에게 겁을 주는 것이다.

겁 먹은 나는, 2022년의 지식인임을 포기하며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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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 민주당 정치인 힘내라!

철학/단상 2022. 3. 25. 08:14 Posted by 闖

보수에서는 뻑하면 586(50대, 80년대학번, 60년대생: 87년 민주항쟁의 중심축)을 물고 늘어지고 

언론에서도 이미지에 똥물 뭍히려는 수작을 부린다.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586만큼 이타적이고 성과를 낸 그룹이 없는데 왜 욕을 먹어야 하나?

하나하나 비교해보도록 하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치그룹에 대한 내 평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이렇게 단순하게 잘라 말하기에는 다양한 정치인이 있지만 크게 보면 이렇게 볼 수 있다.

그룹분류 586 출신 검찰, 언론 출신 관료 출신 지역유지 출신 학계,전문가
(비례대표)
특징 87년 체제 성립의 주역, 학생운동 경력 기득권 집단으로 개혁대상 실무능력 있으나 경로의존적 부동산, 사학 등 많은 재산을 기반으로 함. 특정분야에 전문성 보유했으나 주류를 이끌 영향력 부재
성향 개혁적,
민족주의 성향
명예추구
극우적,
권력추구
중도,
출세지향
보수~극우,
돈&권력 추구
다양함
예시 문재인, 송영길 윤석열, 곽상도 김진표 장제원, 나경원, 박덕흠 안철수

위에 포함되지 않은 그룹은 아직 주류가 될 만큼 인원수나 경험이 없어서 결국 주류그룹에서 목소리를 내는대로 배우고 따라가게 되는데, 저 그룹중에서는 586이 제일 낫다. 만약 586이 퇴장한다면 최소한 군사독재의 잔재들부터 먼저 퇴장해야 순서에 맞다. 586을 고문하던 공안검사출신도 아직 국회의원하고 있는데 그들부터 사라져야 586의 퇴장을 말할 수 있겠다.

 

586그룹을 다시 보니 선녀 같더라

 

 

무(武)는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이라 제1만 있지 제2는 없다.

둘이 싸워서 이기면 제1이요, 지면 제2인데, 제2는 죽기 때문이다.

무력으로 충돌했을 때, 옳고 그름은 염라대왕이 판단한다.

 

문(文)은 각자의 가치에 따라 달라진다.

누구는 한석봉의 글씨가 좋다하고 누구는 왕희지가 제일이라한다.

혹자는 이백이 최고의 시선이라하고 혹자는 두보를 제일로 친다.

그래서 누구나 인정하는 제일이 없는 것이지만, 수 많은 제일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남보다 가난한 것을 걱정하는데, 이는 무(武)로 싸우는 것이다.

세상에 나보다 부유한 사람이 별처럼 많고, 위에는 또 위가 있어서 결코 천하제일의 부자가 될 수 없다.

 

스스로 뜻을 세워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 문(文)의 길이다.

스스로 무(武)가 남만 못해 앙앙불락하는 이는 불행하다.

고해는 끝이 없으나 고개만 돌리면 언덕이라,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

중용 23장 비틀어 보기

철학/단상 2018. 9. 8. 23:20 Posted by 闖

중용에 보면, 卽이 많이 나온다. 곧 즉자로, "A면 곧 B이다." 이런 용법으로 주로 쓰이는데, 중용의 23장을 보자.


어려운 한문이 싫다면 건너뛰어도 된다.


曲能有誠(곡능유성)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면

誠則形(성즉형)  정성을 다하면 곧, 형태로 나타나고

形則著(형즉저) 형태가 나타나면 곧 뚜렷해진다.(현저하다.)

著則明(저즉명) 뚜렷하면 곧 밝아지고

明則動(명즉동) 밝으면 곧 움직이

動則變(동즉변) 움직이면 변하고

變則化(변즉화) 변하면 화한다 (변화한다)

唯天下至誠(유천하지성)爲能化(위능화) 오직 정성만이 변화하게 한다.


요컨대, 조그만 일부터 정성을 다하면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말이고, 오직(唯)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강조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꼬투리를 잡자면 논리적으로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정성을 다한다=형태로 나타난다.


많은 경우 그렇지만, 정성을 다해도 헛수고일 때가 있다. 형태로 나타난다해도 뚜렷하지 않을 때가 있고, 뚜렷해도 어두울 때가 있으며, 발버둥쳐도 변함없는 때가 있으며, 변해도 결국 아무것도 아닌 변화일 때가 있다.


일본에는, 바람이 불면 통값이 오른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뜯어보면 논리구조가 중용과 흡사하다.


1. 바람이 불면, 먼지가 날린다.

2. 먼지가 날려 눈에 들어가면, 시력이 나빠져 장님이 생긴다.

3. 장님은 사미센이라는 일본악기를 연주해서 돈을 벌므로, 사미센의 수요가 는다.

4. 사미센은 고양이 가죽으로 만든다. 그래서 고양이가 줄어든다.

5. 고양이가 줄면, 쥐가 늘어난다.

6. 쥐가 늘어나면, 쥐가 통을 많이 갉아 먹게 된다.

7. 통을 새로 사야하므로, 통값이 오른다.


그럴 듯 하지만, 역시 통계나 확률을 좀 공부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바람이 불면 먼지가 좀 날리지만, 먼지가 눈에 들어가서 장님이 된다는 것은 상관관계가 매우 약하다. 한 만 번 먼지가 눈에 들어가면 만 명중에 한 명 정도가 장님이 될려나? 사미센이 고양이 가죽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체 고양이 숫자에 영향을 줄 정도로 사미센의 수요가 폭증할 리는 없다. 


정확히 표현하면,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

정도일 것이다.


좀 더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1. 정성을 다하면 70% 쯤은 형태가 드러난다. (여기서 70%는 임의의 +숫자이다.)

이런 식인데, 

결국 0.7*0.7*0.7....이런 식으로 마지막에 가면,


"정성을 다하면 가끔 (괜찮은) 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마음수양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유학자들을 탓할 필요는 없다.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은, 계속 시도하면 결국 된다는 말이니까.


"매일매일 끊임없이 정성을 다하면, 언젠가는 (좋은) 변화하게 된다."


이것이 중용 23장의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순자의 적미(積微)개념이야말로 중용 23장을 압축한 단어가 아닐까?


그래도 마음이 개운하지 않은 분은 아래 문장을 드래그해보라.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 정성을 다해도 결과를 얻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




  무협소설세계의 특징 중 하나는 철학적인 면모이다. 요즘으로 치면 라이트노벨 수준의 독자층을 가진 문학치고는 꽤 이례적이다. 이는 무협세계관에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도교와 불교의 영향이 가장 크다.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종교철학의 영향이 그저 들은 풍월이라고는 해도 무협세계에 녹아들어간 것이다.


 무협소설의 대가인 김용의 작품에서 고수의 경지에 오르면 등봉조극(登峰造極)이라고 하는데, 이는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상태이다. 이 경지가 보통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경지인데, 산꼭대기보다 더 높게 올라가려면 하늘로 올라가는 경지인 우화등선(羽化登仙)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은 열반,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더 올라갈 수 없다면 반대로 내려가는 것이다. 고수가 마치 무술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고 전혀 고수의 기세가 풍기지 않는 경지로 들어가면 무공의 경지는 진일보한다. 이것이 반박귀진(返樸歸眞), 가공품이 원목으로 돌아가듯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반박귀진의 고수와 평범한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다른 것은 이미 한 번 지나 온 길로 돌아왔기에 얻은 깨달음이다. 이것이 인생의 진리를 말해준다. 젊어서 좌충우돌 지나온 시기를 나이 들어 되돌아 보고 문득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무협세계의 고수가 아니기에 깨달음을 얻어도 반로환동(返老換童)하지는 못하지만, 반박귀진의 경지에 들면 인생을 또 새로운 맛이 가득해진다. 


 시인 류시화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 읊조렸고, 가수 이적은 '그 땐 미처 알지 못했지'라고 노래했다. 시와 노래에 담긴 감정을 음미하며 이해한다면, 이미 당신도 반박귀진의 고수라 할 수 있다.


 

성선설과 성악설의 현대적 결론

철학/단상 2015. 12. 30. 04:15 Posted by 闖

인간본성이 선한가 악한가에 대한 관심은 철학의 역사와 궤를 같이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인간본성에 대해 수많은 학설이 있지만 크게 성선설과 성악설로 나눌 수 있다. 

인터넷에서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자세히 나오므로 굳이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는 없고,

현대에 와서 과학의 성과에 힘입어 인간본성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인간의 본성을 정의하면 DNA에 입력된 기본행동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유전공학이 과거엔 발달하지 못했기에 본성론은 철학의 영역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DNA에 입력된 기본패턴은 선한가, 악한가?

결론은 선악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선악의 기준은 인간이 만든 것으로,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할 당시에는 없던 개념이다.

그러므로 호모사피엔스(인간)의 본성에는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만든 선악기준으로 볼 때 선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악한 행동을 하기도 할 뿐이다. 이를 억지로 성선설, 성악설로 끼워 맞추는 것은 사람 몸에 침대크기를 맞추는 것이 아니고 침대에 맞춰 사람 몸을 자르거나 늘리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다.

 

옛 철학자들이여, 그대들이 쌓은 성은 비록 뒷물결에 쓸려 무너졌지만 너무 슬퍼하지 말진저. 장강은 쉼없이 흐르고 아이는 어른을 먹이로 자라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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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무결에 관하여

철학/단상 2015. 7. 12. 09:00 Posted by 闖

 김용의 의천도룡기를 보면 시대를 앞서간 신필의 진가를 느끼게 하는 인물이 나온다. 바로 소소(小昭)라는 하녀다. 메이드, 외국인, 로리타 등 복합적인 모에 속성을 갖춘 이 소소는 주인공 장무기의 연인 4명 중 그와 가장 가깝고 진실한 사랑을 한다. 조민은 적대관계 였고, 주지약은 사부의 명을 받았으며, 은리는 자신의 환상 속에 있는 장무기를 사랑했지만, 소소는 장무기를 만난 이후부터는 알뜰살뜰 보살펴주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 자신의 원래 목적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소가 장무기에게 불러준 "천지간에 완전한 것은 없어라"란 노래처럼, 결국 장무기를 위해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게 되어 이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사실 "천지간에 완전한 것"을 찾기 위한 갈망은 인간의 지상과제였다. 이는 수명에 한계가 있는 유기물로서는 어찌보면 본능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조그만 흠만 있어도 일껏 만든 도자기를 깨부수는 인간 뿐 아니라, 짐승도 스스로 낳은 새끼가 장애가 있으면 버리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이 갈망은 전지전능한 신에 의지하기도 하고, 각자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자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완전체는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이 문제에 관해 수많은 지자와 현자들이 고뇌한 결과를 살펴보자.

 

 과학에서 완전체에 대한 추구는 "라플라스의 악마"로 결집할 수 있다. 우주의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 수 있다면, 뉴턴의 법칙을 이용해 과거, 현재의 현상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그것이 가능한 존재가 바로 라플라스의 악마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라플라스의 악마는 뉴턴역학이 양자역학에 자리를 내어 주면서 완전체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불확정성의 원리"가 한 물체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함을 밝혀 라플라스의 악마를 퇴치해버린 것이다. 즉, 과학적인 의미로 완전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상의 그 갈망은 "완벽"에서 잘 나타난다. 완벽이란 글자 그대로 완전한 구슬이다. 흠 하나 없이 둥근 이 구슬은 역사서에 "화씨벽"으로 처음 등장한 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이 완벽으로 옥새를 만들면서 천자의 상징으로 수천년을 전해져왔다. 그러나 연암 박지원이 옥새론에서 말한 것처럼, 이 물건은 완전체가 아니고 도리어 인간의 피를 빨아들이는 귀물이지 절대 "완벽"일 순 없다. 이처럼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틀어봐도 완전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천지간에 완전한 것은 없다. 신필이라 불리는 김용도 대필과 개작문제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신기루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신에 의지하지만 또한 신에 도전하고자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었던가? 결국 완전체가 신기루였다는 것을 입증하였으니 결코 무의미한 과정은 아니었다. 어쨌든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것만은 분명하다. 

 

 완전무결을 원하는 자여, 그대가 그렇다고 믿으면 그것은 완전무결한 것이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처럼 남에게 보이는 순간 사라져 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