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감상

문학 2016. 10. 3. 22:29 Posted by 闖

 무슨 유명한 상을 받아 기삿거리가 됐었던 [채식주의자]라는 소설을 읽었다. 평소의 내 취향이라면 제목을 흘깃보고 지나치거나 한가하다면 첫문단 정도 읽고 내려놓았거나, 낯선 친척의 집에 갔을 때 서재 테이블에 놓여 있다면 누군가 부르러 올 때까지 읽었을 가능성이 있는 그런 정도의 제목이었다. 순수문학을 읽은 기억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인 내가 채식주의자를 읽게 된 것은 마침 인터넷서점에서 마일리지 소멸을 알리는 메일이 도착했기 때문이고 최근 딱히 흥미를 끄는 책이 없었기에 에라이 그럴 것이면 좀 유명한 걸 읽어보자 하는 기분이었다. 전자책으로 결제를 하고 한시간정도 걸려 다 읽었을 만큼 꽤 짧은 소설이었고, 중간에 내팽겨치지 않고 끝까지 읽을만큼 꽤 흡입력이 있었다.

 

  독자에게 등장인물의 내면을 얼마나 잘 보여주느냐가 좋은 작품의 기준이라고 한다면 채식주의자는 분명이 좋은 작품이다. 애초에 이런 문학작품을 읽고 작가가 창조한, 그러나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의 내면을 엿보기 좋아하는 사람의 취향을 그대로 파고든 작품이다. 특히 인간이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응어리 -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검질긴-그 응어리를 잘 묘사했다. 특히 1부에 자신의 응어리조차 관심이 없는, 전형적인 한국중년남성의 시선으로 아내의 응어리를 바라보는 서술은 일품이었다. 오히려 중후반부의 상세한 내면묘사가 거슬릴 정도로 1부의 묘사는 담백하고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했다.중후반부는 내면묘사가 너무 화려해서 아쉬운 맛이 들었다.


 작품 전체의 내용과 주제의식을 생각해 본다면, 제목은 채식주의자 보다는 [몽고반점]쪽이 좋지 않았을까? 작가가 제목을 고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미숙한 탓이겠지만,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성인들의 가면이 부서지고 자신의 검질긴 응어리에 짓눌리는 것을 보여주는 제목으로는 몽고반점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취향상, 어떤 이야기(物語)로써의 흥미는 떨어지기에 두 번 읽지는 않겠지만, 작가가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의 응어리를 보여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그 재미는 검질긴 류의 재미이다.

 인간의 생존본능은 강렬하기 이를데 없지만, 어처구니 없이 죽음을 바라는 일도 흔히 있다. 이 중 널리 알려진 것이 '베르테르 효과'이다. 소설 속 캐릭터의 자살에 공감한 나머지 모방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인공 베르테르의 이름을 딴 효과인데,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모방자살은 아마 '전횡(田橫)'을 따라 죽은 500명일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전횡은 초한쟁패기의 인물로 제나라 왕까지 된 인물이지만, 한신에 의해 제나라가 망하면서 500명의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작은 섬으로 도망쳤다. 짐작컨데 전횡은 자존심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의 자존심은 기록으로 드러난다. 천하를 통일한 한고조 유방이 제나라 지역의 안정을 위해 전횡을 용서하고 벼슬을 주려고 불렀는데, "예전에는 한왕이랑 나랑 같은 왕이었는데, 이젠 한왕은 천자가 되고 난 신하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게다가 한왕의 신하 중에는 내가 형을 삶아죽인 사람도 있는데 같은 군주를 섬기는 것도 부끄럽다."라고 말하고는 자살해 버린다. 참으로 꼬장꼬장한 성격이다.


 여기서부터는 베르테르 효과가 일파만파로 번져간다. 전횡의 시체를 유방에게 전해준 전횡의 부하 2명도 전횡의 장례가 끝나자 자살해 버리고, 이 소식이 섬에 남아있던 500명에게 전해지자 그들도 자살해 버린다. 사마천은 이에 관해서 "전횡의 절개는 고상해서 빈객들마저 의리를 사모해 따라 죽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실 베르테르효과에 군중심리가 더해진 것이지 딱히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전횡과 2명의 자살소식을 섬의 500명이 함께 들었을 것이다. 동시는 아닐지라도 같은 시기에 듣고 함께 모여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상의했을 것이다. 그 슬픔의 현장에 성질 급하고 감수성 풍부한 사람이 분연히 일어나 목을 그어 죽고, 여기에 동조해서 하나 둘씩 자살하기 시작한다. 어어~하는 사이 자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에라이~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나온다. 별로 자살할 생각까진 없던 사람도 분위기와 감정에 휩쓸려서 목을 긋는다. 


 물론 기록된 것처럼 500명 전원이 자살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소수의 '아 이건 좀 거시기한데?'하고 꽁무니를 뺀 피가 차가운 친구들도 있을 것이니까. 그러나 역사기록은 전원자살로 해서 아름답게 포장한다. 보라, 이 얼마나 장엄한 죽음인가? 그러니 생명보다는 충성과 의리가 중요하다, 이런 메세지를 담고 있다. 이 메세지가 유용한 지배수단인 것은 일단 차치하고, 개인의 선택문제로 돌아가자.


 사실 그 순간에 냉정을 유지하면서 남아 있는 삶의 무게와 죽음의 가치를 저울질하기는 어렵다. 이게 가능한 사람은 공감능력이 부족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따뜻한 눈물과 끓는 피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 피와 눈물을 흘리며 죽어야 된다면 이건 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런 모순이야말로 인간사를 풍요롭게 해주는 요소이기 때문에 이해타산만 따지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 당신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인가, 아니면 다정다감한 베르테르인가?


 


  

 

의천도룡기 결말이 바뀐 이유

문학 2016. 8. 21. 01:14 Posted by 闖

 영웅문 3부로 널리 알려진 의천도룡기의 원래 결말은 이렇다. 조민이 장무기에게 마지막 3번째 부탁으로 눈썹을 그려달라고 하고, 장무기가 웃으며 앞으로 평생 그려주겠다고 하는 순간 창문이 열리며 주지약이 등장해 "무기오빠, 나에게도 한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한 것을 잊지 않았지요?"라며 묘하게 웃자 장무기가 만감이 교차하며 붓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 결말은 조민과 장무기는 일생 함께할 것이지만 주지약 역시 함께일 가능성을 내포한 것으로, 작가도 후기에 장무기가 진정 사랑한 사람은 그 스스로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썼다.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결말인데, 2004년 개정판에서는 주지약이 한숨을 쉬며 두 사람이 아이를 가지는 것은 좋으나, 결혼만은 하지말라, 그리고 가끔 자신을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하고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김용 작품의 결말은 대체로 해피엔딩이고, 남녀간의 정은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김용의 작품에서 서로 사랑하지만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는 죽음이 갈라놓는 경우이거나(진가락-향향공주), 피치못할 사정으로 상대방을 떠나는 경우(장무기-소소)등 일부분에 불과하다. 김용은 필시 남녀간의 사랑이 백년해로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소의 경우에는 후기에 "사랑하는 소소와 이어주지 못한 것이 마음이 아프다"라고 썼을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주지약과 장무기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며, 조민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이어주지는 못하겠지만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 여지를 남겨두는 결말을 택한 것이 김용다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김용은 왜 결말을 바꾸었을까? 


 나는 김용의 사랑관념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이에 백년해로 하는 것 이상 좋은 것이 어디 있겠냐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것이다. 주지약의 사랑이 구판에서는 장무기와 해로할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이었다면, 개정판에서는 단념하는 대신 장무기의 결혼식을 자신만의 것으로 남겨두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장무기의 결혼식은 일생에 단 한번 주지약과 치루다만 수라장의 기억이 될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없으니 단 하나의 추억이라도 소중히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도 사랑의 한 형태이니,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이어진 셈이다. 


 김용도 나이들어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한 것이 아닐까? 경험은 사람을 변화시키니 말이다. 문득 주지약의 마지막 한숨이 가슴에 저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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