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세계의 특징 중 하나는 철학적인 면모이다. 요즘으로 치면 라이트노벨 수준의 독자층을 가진 문학치고는 꽤 이례적이다. 이는 무협세계관에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도교와 불교의 영향이 가장 크다.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종교철학의 영향이 그저 들은 풍월이라고는 해도 무협세계에 녹아들어간 것이다.


 무협소설의 대가인 김용의 작품에서 고수의 경지에 오르면 등봉조극(登峰造極)이라고 하는데, 이는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상태이다. 이 경지가 보통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경지인데, 산꼭대기보다 더 높게 올라가려면 하늘로 올라가는 경지인 우화등선(羽化登仙)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은 열반,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더 올라갈 수 없다면 반대로 내려가는 것이다. 고수가 마치 무술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고 전혀 고수의 기세가 풍기지 않는 경지로 들어가면 무공의 경지는 진일보한다. 이것이 반박귀진(返樸歸眞), 가공품이 원목으로 돌아가듯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반박귀진의 고수와 평범한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다른 것은 이미 한 번 지나 온 길로 돌아왔기에 얻은 깨달음이다. 이것이 인생의 진리를 말해준다. 젊어서 좌충우돌 지나온 시기를 나이 들어 되돌아 보고 문득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무협세계의 고수가 아니기에 깨달음을 얻어도 반로환동(返老換童)하지는 못하지만, 반박귀진의 경지에 들면 인생을 또 새로운 맛이 가득해진다. 


 시인 류시화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 읊조렸고, 가수 이적은 '그 땐 미처 알지 못했지'라고 노래했다. 시와 노래에 담긴 감정을 음미하며 이해한다면, 이미 당신도 반박귀진의 고수라 할 수 있다.


 

라인하르트의 와인(wine)

경제학 2016. 7. 12. 17:00 Posted by 闖

  

 라인하르트의 손 - 조각가가 최대의 정열과 최고의 재능을 결집시켜 만들어낸 것 같은-이 천천히 들어올려지더니 그 안에 쥐어 있던 술잔을 거꾸로 뒤집었다. 그러자 종이뭉치에 진홍의 액체, 즉 와인이 부어졌다. 장군들의 시선이 일제히 핏빛으로 물드는 종이뭉치에 집중되었다. 잠시 후 라인하르트가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종이를 한 장씩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한 장, 또 한 장...... 그제야 미터마이어와 로이엔탈의 눈동자엔 이해의 빛이 천천히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와인이 스며들지 않은 종이를 들어올린 젊은 독재자는 그것을 장군들에게 보였다.

 "잘들 보시오. 아무리 얇은 종이라도 수십 장 겹쳐 놓으면 와인이 스며들지 않는 종이

가 있게 마련이오. 나는 양 웬리의 예봉을 이 전법으로 꺾을 생각이오. 

적의 병력은 나의 방어진을 전부 돌파하진 못할 것이오."

 -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中    

















 인간은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이고, 집단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요소라고 할 수 있다. 각 개인은 집단에 소속감, 동질감 등을 느끼며,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소 개인적인 손해는 감수하기도 한다. 보통의 경우 당장 약간 손해보더라도 집단에 공헌하는 것이 개인에게 있어서도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 경제학에서 이 현상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이론이 낙수효과(Trickle-down)이다.


 집단이 고도화된 지금에 와서는, 집단의 이익이 그 구성원에게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와인이 라인하르트의 종이뭉치에 다 흡수되어 버린 것처럼, 집단의 이익이 어디론가 흡수되어 버린 것이다. 진보적인 경제학자들은 중간에 다 흡수해버리는 시스템이 문제라고 할 것이고, 보수적인 경제학자들은 와인이 부족해서 아래까지 닿지 않은 것이므로, 더 많은 와인이 필요하다고 반론할 것이다. 어느 쪽이 옳튼, 혹은 와인을 누가 다 마셔 버린 것인지 굳이 따지고 들 생각은 없다.(분명 누군가는 와인에 취해 콧노래를 부르고 있겠지만)


 중요한 흐름은, 집단의 이익이 구성원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게 되면서 동질감과 소속감이 엷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 흐름은 집단의 약화로 이어지고 더욱 심해지면...



 

   로이엔탈은 기함 트리스탄의 함교에서 멀어져가는 행성을 바라보았다.

 "전군이 되돌아와 양 웬리를 포위섬멸하란 말이지......"

 그 혼잣말은 9할가량 입안에만 머물렀으므로 들은 사람은 당사자 뿐이었다.

 "훌륭한 전략이기는 하군. 그러나 되돌아 오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中   


 



 




 


  

 

한국경제의 패러다임 -1-

경제학 2016. 7. 4. 23:22 Posted by 闖

 앞서 이야기한 경기침체와 관련한 글을 먼저 읽은 후 이 글을 읽어주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왜 패러다임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하는지 전혀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학, 특히 경제제도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흔히 해외사례를 드는 경우가 많다. 해외사례가 마음에 들면 그대로 도입하자고 주장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국현실과는 맞지 않다고 반대한다. 보통 한국 현실에 맞게 좀 수정해서 도입하자고 타협하고, 이것 저것 수정하다보면 제도의 원래 취지와는 영 동떨어진 제도가 한국적인 제도가 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대표적인 예를 딱 하나만 들면, 북유럽의 복지국가처럼 한국도 복지국가로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그건 북유럽이니까 가능하지 한국현실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며, 어쨌든 복지제도는 필요하니까 이런저런 변형을 통해 한국형 복지제도가 도입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형(形)이란 것이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지, 있다면 변화불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지켜야 할 정체성인지 이런 논의가 필요하다.


 한국인이나 북유럽인이나 사고방식이 같다면 같은 자극(제도)이 주어지면 같은 반응(성과)을 보일 것이다. 물론 한국인은 북유럽인과 다른 환경에서 자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가까운 중국, 일본과도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과학적인 사실은, 아직 인류라는 종 자체가 민족에 따라 구분할 만큼 분화되지 않았다는 것, 그러므로 한국적인 사고방식은 넓은 의미에서 주위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변화해 온 것이며, 변해 갈 것이라는 것이다. 자, 그럼 한국형은 존재하기는 하지만 변화가능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며, 각자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정체성을 어떻게 변화발전시켜나갈 것인가에 관한 문제가 된다. 


 경제패러다임과 관련된 한국형이라고 한다면, 가장 근본적인 것은 수직적인 사고이다. 이것이 서구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개인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한 집단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것이 유교문화의 영향인지, 농업공동체생활의 영향인지 따질 필요는 없다. 어쨌든 수천년간 한국에서 이 사고방식이 가장 생존에 적합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한국적인 제도라는 것은 수평적인 사고로 만들어진 서구의 기존 제도를 수직적인 사고방식으로 재구성한 것이 된다. 사실 한국의 고도성장은 이 수직적이며 일사불란한 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집단을 위해서 개인은 희생하며, 대신 집단이 성장하면서 구성원도 그 혜택을 누린 것이다. 공업시대에서는 수직적 사고가 결과적으로 한국의 번영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기공업시대, 장기경기침체에 접어든 지금도 수직적인 사고가 한국에 좋은 것인가? 한국(집단)과는 별개로 한국인(구성원)에게도 좋은 것인가? YES라면 이 불황을 다 같이 으쌰으쌰 한국적으로 단합해서 해쳐나가야 할 것이고, NO라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하지 않겠는가? 이제부터는 이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면서 동시에 적절한 경제패러다임을 생각해보도록 하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