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찌벤케이와 무는 개

기타 2018. 2. 11. 09:17 Posted by 闖

 일본어 표현 중에 "우찌벤케이>집안에서는 벤케이" 라는 표현이 있다. 벤케이는 일본 역사상 유명한 맹장이다. 한국어 표현으로는 요즘 유행하는 "방구석 여포"에 딱 대응하는 말이다. 즉, 안전한 집안에서는 벤케이나 여포처럼 용맹하지만 밖에 나가면 조용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북한 문제만 나오면 당장이라도 전쟁을 해서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경우가 딱 우찌벤케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먼저 자원입대라도 하던가, 군에서 안 받아줄 정도의 나이라면 전방으로 이사라도 하는 것이 어떤가? 물론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정치적 이해관계자이거나, 그저 별 생각없이 감정적으로 이야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전쟁의 이해득실을 깊이 생각한다면 무책임한 전쟁론 보다는 뒤로는 만반의 준비를 하되 앞으로는 항상 대화를 통한 평화를 추구해야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동의할 것이다.


 "무는 개는 짓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실제 전쟁을 하게 되면 기습적이고 전격적으로 하는 것이 효과적이므로 진정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은 큰 소리로 떠들지 않는 법이다. 현 문재인정부의 대북대응이 딱 그러하다. 트럼프가 문재인을 100%지지하는 것은 애초에 미국의 무기를 대량구매하고 만의 하나를 대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북한도 승산이 없는 도박보다 대화에 나서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이 단지 시간벌기일지라도 평화의 시간은 전쟁의 시간보다 나은 것은 자명하다.


 우찌벤케이와 방구석 여포들의 입은 막을 수가 없다. 오죽하면 이런 비유가 관용어로 쓰이겠는가. 그러나 경청할 필요는 없으며 그저 어린아이의 어리광를 달래듯이 그저 응응 얼러주면 충분하다. 이런 여론을 생산하고 확산시키고자 하는 세력-수구세력-에게 선동당하는 것은 그들의 전쟁에 기꺼이 총알받이로 나가게 되는 것임을 기억하자. 



기사단장 죽이기 감상

문학 2018. 1. 29. 00:47 Posted by 闖

 작년 오월, 일본 치바현 츠다누마역 호텔에 묵을 때, 역의 쇼핑몰에서 서점에 들렀다. 반쯤 마음먹고 있었기에 별 다른 망설임 없이 "騎士団長殺し:기사단장죽이기"상/하권을 골랐다. 점원이 북커버를 씌워 줄까 물어보기에, 한국에서 책을 사는 것과 달리 종이커버를 씌운 책을 사게 되었다. 일본인은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강하다. 일본에서 지하철 등에서 책을 읽는 모습은 스마트폰을 만지는 모습 만큼이나 자주 보게 되지만, 그 책의 제목을 보기는 힘들다. 다들 커버로 표지를 숨기기 때문이다. 전철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140cm정도의 작은 체구의 앳된 중학생이 열심히 읽던 -시기적으로 중간고사 중이었을텐데도-  "西部戦線異常無し:서부전선 이상없음." 외에는 제목을 볼 수 없었다. 이 역시 표지를 본 것이 아니라 페이지의 머릿글로 나온 작은 글씨를 슬쩍 보았던 것이다. 그 외에 "화이트앨범2"를 찾아봤지만 역시 오프라인서점에서 사기는 너무 늦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책을 샀으니 키타하라 하루키가 나오는 책도 사고 싶었지만,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니까.


 그렇게 2017년 5월에 산 두 권을 다 읽은 것이 2018년 1월이라니, 예전의 나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느긋함이었다. 12권짜리 장편소설도 밤을 세워가며 다 읽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왠지 조용한 방에서 읽고 싶지 않았다. 아마, 기왕에 북커버를 했으니 일본인들처럼 기차나 지하철, 버스에서 이동하는 동안 읽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이동 중에 짬짬이 읽다보니 반년이 넘게 걸렸다. 옆에서 누가 뭘 읽고 있으면 자연스레 신경이 쓰여 뭘 보나 했을텐데, 북커버를 씌웠기에 더 궁금해졌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에고는 충족된 것 같다. 


 기사단장 죽이기,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무엇인가일 것이다. 주인공은 언젠가 자신의 기사단장 죽이기-흰 스바루 포레스트의 남자-를 다시 그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화가로서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아니, 유즈와 무로, 마리에와의 인연으로 이미 그의 기사단장 죽이기는, 이데아든 메타포든 벌써 완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더 그리든 그리지 않든 주인공이 원하는 것은 벌써 손에 넣었으니까.

 주도면밀하고 목표가 분명하면서 추진력이 뛰어난 멘시키, 그러나 그의 기사단장 죽이기는 바로 ~일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밸런스를 잡은 채 살아가는 것이다. 애매모호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도면밀한, 그러나 그 애매모호함을 가까이두고 싶어하는 멘시키. 그가 굳이 마리에의 출신을 확인하고자 하지 않은 것은 충분한 계산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마리에가 그의 딸인지 확인하고자 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을 이 남자-멘시키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해서 어쩔 것인가? 자신의 딸이라고 해도 마리에에게 그 사실을 가지고 함께 살자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아니라면 멘시키에게 남는 것은 없다. 마리에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르는 상태야말로, 멘시키에게 골디락스의 상태인 것이다.  

 마리에, 13세의 소녀의 기사단장 죽이기는 가슴이 부푸는 것일게다. 그리고 65C 정도가 되면, 다락방에서 부엉이를 보며 주인공에 기대 흐느끼던 소녀는, 아마 기사단장은 잊어버리고 숙녀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화장기 없는 13세 소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주인공이 그린 미완의 초상화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뇌리에도. 이 소설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마리에의 흐느끼는 모습, 그리고 그 머리를 쓰다듬는 주인공의 모습이 기억될 것이다.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명사회적(的) 돌도끼  (0) 2019.01.17
화이트앨범2의 섹스묘사와 하루키  (0) 2018.04.17
채식주의자 감상  (0) 2016.10.03
의천도룡기 결말이 바뀐 이유  (1) 2016.08.21
영웅 소봉의 자결에 관하여  (0) 2016.04.07

[추천]밖에서 본 한국사

역사/한국사 2017. 8. 1. 19:17 Posted by 闖

 역사를 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관점이다. 같은 역사적 사실이라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고 의미가 달라지고 평가가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한국인은 좀 밖에서, 그러니까 비한국적인 관점에서 한국사를 볼 필요가 있다. 축구국가대표팀을 무조건 응원하는 관점이 아닌, 냉철한 도박사의 시점에서 관찰해보는 것이다. 서울대의 3대천재 중 한사람으로 알려진 역사학자 김기협의 [밖에서 본 한국사]는 그런 책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민족*은 위기 때마다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해 왔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유사이래 주변 이민족을 흡수해온 중국세력에 흡수되지 않고 한반도에서 생존해올 수 있었던 비결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바다(대만), 산맥(위구르, 티벳), 사막(몽골) 같은 자연조차 결국 중국의 확장을 저지하지 못했다. 중국의 중심에서 가장 가까운 이민족인 한민족이 지금까지 흡수되지 않은 것은 조화의 생존전략이 주효했던 것이다. 


요즘 같이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한반도에서 부딪힐 때, 조화의 전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밖에서 한 번 들여다 보면 어떨까?


*저자는 국가보다 민족의 관점을 중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