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이 왜 모험적인 전략을 취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제가 가장 동의하는 대전제는 그가 군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중텐의 설명인데, 유비와 같은 군주는 나라를 걸고 도박을 할 수 있지만
월급사장인 제갈량은 나라를 걸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 덧붙여서, 저는 저 나름대로 제갈량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근거를 하나 더 써보려고 합니다.
손자병법에 병귀신속이라, 좀 부족하더라도 재빨리 치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갈량의 북벌은 이 점이 부족했기에 매번 강대국 위나라가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주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손자병법을 인용하며 제갈량이 병법에 능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과 장략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고 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제갈량이 손자의 이 구절을 몰랐을까요?
손자병법은 이미 조조가 주석을 달 정도로 삼국지 시대에 널리 알려진 병서였습니다.
제갈량은 이 손자병법을 당연히 알고 있었고, 많은 연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병귀신속, 병문졸속에 따르지 않았을까요?
1차 북벌에서는 확실히 손자병법의 장점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위나라는 유비가 죽자 '촉에 더 이상 장수가 없다고 생각'해 전혀 방비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제갈량은 '두배의 적을 분리시킨 후 ', '뜻하지 않은 곳으로 나아가', '적의 땅에서 식량을 취하'려고 했습니다.
조운이 양동으로 위나라의 주력을 붙든 사이, 기산으로 나아가니 양주일대가 동요하고 3군이 호응하였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손자병법에 따른 움직임입니다.
이 북벌이 실패하고 제갈량은 이렇게 말합니다.
"군사와 장수를 줄이고, 벌을 분명히 하고 과오를 반성하여, 장래에 능히 변통할 수 있는 방안을 헤아리려 하오."
손자병법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능히 변통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자병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자병법이 손자병법보다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1차 북벌 후 촉한의 상황이 오자병법을 적용하기에 더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이 손자병법을 읽을 수 있었다면, 자연히 오자병법도 읽었을 것입니다.
오자병법은 손자보다는 상대적으로 준비를 철저히하고 군사를 움직이는 요령을 가르칩니다.
이제 그 변통할 수 있는 방안이 어떤 것인지 오자병법을 살펴봅시다.
오자병법의 오기는 76회의 큰 전투를 치뤄 64승 12무 무패라는 전적을 거두었습니다.
오기가 육성한 군대는 무졸(武卒)이라고 불리는 정예 중보병대였습니다.
이 무졸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 칼, 쇠뇌, 화살50개, 3일치 식량을 휴대한 채 100리를 행군하는 정예병입니다.
오늘날 일반 보병이 소총과 탄띠, 방탄모로 무장하고 완전군장을 한채 행군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사람들은 영양상태나 체격, 장비의 중량 등 모든 면에서 현대보다 불리한데 그것이 가능한 정예보병,
이것은 국가에서 총력을 기울여 육성한 정예 중에 정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만든 촉한의 군대를 보면 확실히 무졸이 떠오릅니다.
얼마 없지만 기록에 남은 촉한의 군대를 보면,
노를 잘 다루는 특수병, 힘센 청강병을 포함한 무당비군, 백이병 등 유독 정예보병과 궁병에 관한 기록이 존재하며,
제갈노, 목우유마와 같은 군사장비 개량에 힘쓴 내용이 있습니다.
또한, 가장 핵심적인 군사훈련법으로 팔진도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제갈량버젼의 무졸이 바로 팔진도를 익힌 정예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은 팔진도를 완성한 이후 "다시는 패배하는 일이 없을 것" 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칩니다.
이렇게 양성한 정예병을 사용할 때 가장 주의해야할 것은 비전투 손실입니다.
정예병이 야전에서 적과 싸울 때 교환비가 뛰어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비전투 손실은 정예병과 신병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일어납니다.
특히 험한 산지를 행군할 때 완전무장한 정예병이 경무장한 일반병보다 더 힘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갈량의 정예병을 상대로 위나라는 회전을 피하고 비전투손실을 강요했고,
정예병을 불리한 조건에서 소모시킬 수 없었던 제갈량은 불승불패의 국면을 유지한 채 퇴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정예병은 그야말로 촉한의 모든 것이 결집된 정수인데, 제갈량은 분명 이 판돈을 들고 도박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먼저 군대를 일으켜 강대한 위나라를 선공했으니까요.
이것이 도박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는 냉정하게 확률을 계산하는 승부사였으며,
이 돈이 자기 돈이 아니라 유비네 집안의 돈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갈량은 승산이 낮을 때는 판돈을 다시 거두어 들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판돈을 만들기위해 그와 촉한이 기울인 노력을 생각하면, 도저히 '올인'을 외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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